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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운치리의 지명  

 

운치리(雲峙里)



 
 신동읍 소재지에서 북쪽에 위치해 남한강 상류인 동강을 끼고 있는 마을로 동쪽은 정선읍 가수리와 접해 있다. 본래 평창군 동면에 속해 있던 땅으로 고종32년(1895년)에 정선군에 편입되었는데 운치리(雲峙里)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지방행정구역 통폐합 때 납운돌(納雲乭)과 돈니치(敦니峙)를 병합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백운산(白雲山)과 곰봉(雄峰) 사이로 흐르는 동강 변에 형성된 마을로 알려지지 않은 석회암 동굴이 많고 깊은 골짜기와 기암절벽의 봉우리들도 많이 있다. 한창 때는 2백 가호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90여 가호 3백여 명의 주민들이 수동, 점치, 납운동, 돈니치, 설론, 터골, 번들 등지의 자연부락에서 고추, 콩, 옥수수 등의 밭농사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주요 성(姓)씨로는 강릉 최(崔)씨, 경주 이(李)씨, 동래 정(鄭)씨 등이다. 영월댐이 건설되면 수동, 점치 마을이 완전 수몰되고 번들, 납운돌  마을은 거의 대부분이 수몰된다.


수동(水洞)
본래 지명은 지며(芝 )였다. 번들 서북쪽 강 건너 마을로 뒤로는 백운산(白雲山)을 등지고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 상류인 동강(東江)이 흘러가는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백운산에서 흐르고 앞으로는 강물이 풍부하다고 해서 '수동'(水洞)이라고 했다.
해마다 시월이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듬해 큰 물로 떠내려갈 때까지 겨울나기로 사용하는 섶다리를 놓곤 한다. 지금은 12가호 4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옥수수, 감자 등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담방골
수동에서 백운산에 오르는 골짜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계곡 주위의 나무가지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담방거린다고 하여 '담방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갈령재
수동 북쪽에서 평창군 미탄면 수청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점그늘
수동에서 구름재를 넘는 골 오른쪽에 있다. 옛날 쇠를 녹여 가마솥 등을 만들던 점터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벌무골
수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본래는 '풀미골'(冶谷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벌미골'로 변했다.  옛날 골 안에 쇠를 불리던 풀미간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범에굴
담방굴 입구에서 백운산 정상을 향해 서쪽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수직으로 내려간 구름 안쪽에 동굴 입구가 나 있는데 주변 수목이 너무 우거지고 옛날부터 범이 살던 굴이라고 해서 '범에굴'이라고 한다. 숲이 너무 우거져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가래나무골
수동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 성황당이 있던 곳 안쪽을 일컬으며 골짜기 안쪽에 한방의 약재로 쓰이는 가래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래나무골 굴
가래나무골 안쪽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높이 3m, 폭 5m의 입구는 동쪽을 향하고 있고 동굴은 입구 에서 서쪽과 동북쪽 두 갈래로 갈라져 있으나 깊이는 알 수가 없다.

상정 바우
구름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해발 960m 고지에 있는 바위다. 금강산의 촛대봉과 같이 높이가 수십 척의 뾰족한 바위로 모든 바위들 가운데 으뜸가는 바위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용첨지 밭골
수동 마을 뒤편에 있는 골짜기다. 구름재 아래쪽에서 옛날 용(龍)첨지라는 사람이 험한 계곡에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해서 '용첨지 밭골'이라고 한다. 본래 첨지(僉知)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란 벼슬 이름이었으나 훗날에는 나이가 들어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 첨지라 부르기도 했다.

구름재
수동 위쪽에서 백운산 능선을 향해 오르는 고개다. 고개 앞으로는 동강물이 휘돌아 흐르고 흐리거나 비가 온 후에는 항상 안개가 자욱한 고개로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이 구름을 뚫고 산을 넘어 다녔다고 하여 '구름재'라고 했다. 옛날에는 구름재를 넘어 평창군 미탄면 수청리와 미탄면 마하리 문희 마을로 넘어 다니곤 했다.

비둘기굴
용첨지 밭골에서 서북 방향으로 백운산 중턱에 위치한 자연동굴이다. 입구는 기어들어 갈 만큼 좁으나 내부는 수십 평 정도 되며 동굴 남쪽으로는 햇빛이 들어올 정도로 구멍이 나 있다.  크고 넓은 동굴 안에 비둘기가 많이 산다고 해서 '비둘기 굴'이라고 한다.

수동 나루
수동에서 강 건너 번들로 건너가는 나루터다. 수동 위쪽의 가수리 가탄, 해매에서 굽이쳐 오는 물이 마을 앞에 이르러 폭이 넓어져 나루터가 생겨났다. 평상시에는 줄을 당겨 오가는 철선(鐵船)을 이용하지만 겨울이 다가오면 강물이 얼어붙기 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다릿발을 세우고 널레를 걸치고 그 위에 솔가지를 양 옆으로 놓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에 대한 두려움을 덜게 해주는 섶다리를 놓는다. 남한강 천리 물길의 빼어난 서정이 담긴 이 다리도 이듬해 장마가 지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찬바람이 나면 다시 놓는 일을 수백 년 째 되풀이하고 있다.

용바우
수동 나루 아래쪽 강변에 있는 바위다. 직경이 4m가 넘는 바위로 한가운데가 마치 탈로 썰어 놓은 듯 갈라져 있는데, 옛날 강물에서 용(龍)이 하늘로 올라갈 때 바위를 쪼개고 올라갔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곳은 낚시터로도 소문이 난 곳으로 차돌메기 등의 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석 바우
용바우 위에 있는 큰 바위다. 바위가 크고 높다고 해서 '고석 바우'라고 한다.

독지
용바우에서 동쪽으로 6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바위로 된 산능선 끝에 있는 분지를 '독지'(篤地)라고 하는데, 1980년대 초반 까지만해도 5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용구녕
독지 마을 북쪽에 있는 샘물이다. 옛날 용이 나온 구멍이라고 해서 '용구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번들
수동에서 강건너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산사면에 형성된 넓은 평지를 '번들' 또는 '둔들'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이 '번들'(飜坪)로 되었다. 한때 17가호의 주민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12여가호 5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배추, 등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만경
번들 마을 뒤에서 납운돌 쪽으로 있는 벌판이다.

너래 반석
번들 남쪽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포장길 주변을 말한다. 옛날 길 주변에 넓적한 돌이 있었다고 해서 '너래 반석'이라고 부른다.

산제골
번들마을 마을회관 뒤쪽에 있는 계곡이다. 예전에 골짜기 안에 산제당이 있었다고 해서 '산제골'이라고 한다.

고재뻘
수동 건너에서 가수리로 가는 도로 왼쪽 강변에 생긴 모래 퇴적층이다. 정선읍 가수리 쪽에서 흐르는 동강 물길이 수동 상류인 가탄과 해매에서 휘돌면서 강 어귀에 높은 모래 퇴적층을 만들어 놓아 '고재뻘'이라고 부른다. 엣날에는 여러 가호가 살았으나 애를 낳으면 고자(鼓子)를 낳는다고해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잉어소
고재뻘 건너편에 있는 여울이다. 옛날부터 잉어가 많이 산다고 해서 '잉어소'라고 한다. 소(沼)가 깊어 명주실 한 타레를 풀어도 모자랐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삼형제 바우
고재뻘 북서쪽 여울목 위에 있는 바위다. 사람 형상의 큰 바위 세 개가 솟아있어 '삼형제 바우'라고 한다.

평창 마을
번들 동쪽에 있는 강변 마을이다. 오래 전 평창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했다고 해서 '평창 마을'이라고 한다. 지금은 2가호가 살고 있다.

백운산(白雲山)
  운치리 동강 변에 있는 해발 882.5m의 산이다. 신동읍 운치리와 덕천리, 평창군 미탄면을 가로막아선 산으로 흰 구름을 연상하듯 능선에 항상 안개가 자욱하다 하여 '백운산'이라고 한다. 산세가 험한 산으로 1968년 울진, 삼척으로 침입해 북상하던 북한 무장간첩 15명이 백운산에서 예비군과 교전을 해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병풍과도 같은 벼랑을 한 곳에 모아놓은 것과 같은 산으로 동강의 굽이치는 절경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산이다. 또한 정상으로 이르는 길에는 돌이끼에 의해 형성된 석화(石花)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정상에서는 칠족령 능선을 타고 신동읍 덕천리 제장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으며, 최근들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산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납운돌(納雲乭)
동강변 납운교를 지나 갈벌 동쪽으로 난 골짜기를 따라 3백 여 미터 들어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예미초등학교 운치 분교가 있는 마을로 마을 앞 나주 정씨 비각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넙적개석(넓은 반석)이 있다고 해서 '너븐돌'이라고 했는데 일제시대에 한자어로 고치면서 '납운돌'(納雲乭)이 되었다. 일제시대 '납운돌'로 지명이 바뀌기 전 까지만해도 주민들은 '너븐돌'로 불렀으며, 옛 족보등 문헌에는 광석리(廣石里)로 바르게 표기했던 것으로 보아 일제에 의한 한자어 지명이 발음대로 한자를 표기했거나 아니면 돌(乭)자등을 넣어 격하시키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한때는 30가호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9가호 2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등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운록샘
납운돌에서 돈니치로 가는 길 왼쪽에 있다. 땅 속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오는 샘터이며 그 위로는 수령이 150년 되는 매체나무 고목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수년 전 경희대학교 대학생들이 농촌 봉사활동을 와서 샘 주변에 시멘트 공사를 해 깨끗하게 단장하고 시멘트 구조물의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갈벌
동강 변에서 납운돌로 들어가는 길목 강가에 형성된 뻘이다. 갈(葛)자가 붙은 마을은 흔히 '칡'과 관련해 생각하지만 오히려 '강' 또는 '늪'과 관련된 지명에 많이 붙는 자다.

탄광 구렁
고성리에서 나리재를 넘어 오른쪽으로 난 골 안쪽에 20여 년 전 무연탄을 캐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해서 '탄광 구렁'이라고 한다.

점치  
수동 남쪽의 강변 마을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유명한 점쟁이가 살았다고 해서 '점치'라고 한다. 백운산 자락이 뒤를 막아서 있고 배를 타고 건너야 하기에 육지에 있는 섬마을 이라고 했는데, 일제시대에는 강변에서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이 많았고 지금은 수석을 줍기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다. 현재 4가호 1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옥수수 감자 등 밭농사를 지으며 강에서 쏘가리 등의 고기를 잡기도 한다.

점치 나루터
점치 마을에서 갈벌 위쪽으로 오가는 나루터로 철선(鐵船)이 쇠줄을 이용해 오간다.

지름 베리
점치 마을 앞 강 건너편에 있던 벼랑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던 벼랑으로 벼랑 밑으로 난 길을 다니기에 너무 미끄러워 '지름 베리'라고 불렀다. 1968년 백운산으로 숨어 들어온 무장간첩들을 소탕하기 위해 벼랑을 깍아 작전도로를 개설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그 밑의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스럽게 밟고 다녔다고 한다. 정선지방의 사투리에서 '기름'은 '지름'으로 발음했고 높은 벼랑을 뜻하는 '벼리'는 '베루', '베리'라고 했다.

점치굴
점치 마을 뒷산 해발 400m지점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동굴 입구가 두 곳으로 아래로 난 동굴로 10m가량 들어가면 동굴 위로 난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고 위쪽으로 난 동굴에는 베틀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형제 바우
점치굴 북쪽 해발 400m지점에 있는 바위다. 수직으로 우뚝 선 두 개의 바위 모양이 마치 의좋은 형제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해서 '형제 바우'라고 한다.

병목
점치 마을에서 덕천리 민밭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벼랑 아래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병목'이라고 했는데 그 아래에는 수직동굴이 있다.

노루메
납운돌에서 설론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노루목'이 변해 생겨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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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동강아리랑』, 2000, 수문출판사
* 위 지명유래 자료는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로부터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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