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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덕천리의 지명  
 
 

덕천리(德川里)




  정선군 신동읍 소재지인 예미리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평창군 동면 지역으로 고종32년(1895년)에 정선군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골(所洞), 바새(所沙),연포(硯浦), 제장(堤場)을 병합하여 큰 산을 뜻하는 덕산(德山)과 내(川)의 이름을 따서 덕천리(德川里)라 하였다.
 남한강 상류인 동강(東江)의 절경을 끼고 있는 마을로 물굽이가 심해 여러 곳의 모래 퇴적 지형이 형성되어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1990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팀이 소골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을 대량으로 발국해 대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발굴지 주변 밭에서는 지금도 깨진 토기 조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소골 제장 등지에는 훼손된 고인돌 등의 유적이 남아 있고 아직도 채 발굴하지 못한 유물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덕천리 강변지역은 40여 년 전 까지만해도 서울로 목재를 운송하던 떼꾼들이 쉬어 가던 객주집들이 들어서 강변 경제권을 이루기도 했다. 북서쪽 동강 하류로는 영월군 영월읍 문산리와 평창군 미탄면이 맞닿아 있다.
 영월읍 거운리 만지(滿池)에 영월댐이 들어설 경우 마을 모두가 대부분 수몰 지역인 덕천리에는 20여 년 전 까지만해도 80여 가호가 넘게 살았으나 계속되는 이농현상으로 인해 지금은 39가호 159명의 사람들만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덕내
원덕천(元德川)이라고도 하며 덕천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북쪽 골짜기 아래로 동강 물길이 흘러 '크다'는 뜻을 가진 '덕'을써 '덕내'(德川)라고 불렀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한자식 지명으로 바뀌었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도 원덕천으로 되어 있으나 마을에서 수대째 살아온 노인들은 '덕내'라고 부른다. 한때는 30여 가호 5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11가호 20여 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검은 들배기
덕내 뒤쪽에 있는 바위다. 다른 바위에 비해 유난히 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기'는 '박다'의 명사형에서 나온 말로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두꺼비 바우
덕내 위 남쪽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 모양이 마치 커다란 두꺼비 한 마리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두꺼비 바위'라고 부른다.

큰재
덕내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신병산의 큰 고개로 재가 험하고 커서 '큰재'라고 한다. 고개를 넘으면 영월읍 거운리 길운으로 통한다.

무랑골재
덕내에서 영월읍 거운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골짜기 안쪽에서 많은 물이 흘러 나오므로 '물안골'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무랑골'로 불려지게 되었다.

물레재
덕내에서 바새로 넘어가는 고개로 산중턱 굽이를 돌아 물레처럼 돌아간다고 해서 '물레재'라고 한다. 예전에는 일반 승용차로 넘어 다니기가 힘들었으나 연포(硯浦)지역이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다.

요골
덕내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이 깊고 충충한데다가 숲이 너무 우거져 음산하다고 해서 요골이라고 한다. 산나물을 뜯기 위해 온 산을 다니는 고성리, 덕천리 마을 사람들도 '요골'만큼은 들어가기를 꺼린다고 한다.

뒤실
덕내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실'은 '마을'을 뜻하는 말로 마을 뒤에 있어서 '뒤실'로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여러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밭만 남아 있다.

푯대봉
덕내 서쪽에 있는 산이다. 일제시대에 측량을 하기 위해서 산 꼭대기에 푯대를 박았다고 해서 '푯대봉'이라고 부른다.

산개굴
골덕내에서 자르메로 넘는 골짜기다. 골짜기의 지형이 디딜방아의 살개처럼 생겼다고 '살개골'이라고 했는데 쉽게 발음하다 보니 '산개굴'이 되었다.

골덕내
제장 앞 강 건너편에서 덕내 사이에 있는 골안 마을이다. 마을 아래로 큰 물이 흐르므로 '골덕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빈 집만 남아 있고 한 가호만 살고 있다.  골덕내 아래쪽 강변에는 제장으로 통하는 나루가 있다. 예전에는 소골에 있던 것이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골덕내로 옮겨온 것이다.

곡우소
소골에서 골덕내로 가다가 제장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휘어진 소(沼)를 말한다.

단배역
고성분교 뒤에서 덕천리 소골로 들어가는 협곡을 말한다. 오랜 옛날 이골 오른쪽에 단맛이 나는 커다란 배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단배나무역'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단배역'으로 변했다.

당목이 재
고성분교 뒤에서 소골로 들어가는 단배역 오른쪽에 있는 잘룩한 고개다. 옛날 고개를 오르는 길목에 성황당이 있어 '당목이재'라고 부르는데, 고개 위에 올라서면 운치리에서 흘러드는 나리소와 주변의 기암절벽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소골(所洞)
   덕내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고을 우두머리가 살았던 곳이어서 소골(所洞)로 불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예전의 문중 기록이나 개인 문집 등의 기록을 살펴보면 '소골'(所洞)을 '昭谷'. '沼谷' 등으로 표기하고 있어 옛날 지명이 한자화 되는 과정에서 혼동을 가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석회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칠족령(七足嶺) 아래 강변 마을로 1990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팀의 지표조사를 통해 마을 앞 모래 퇴적층에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비롯한 유물이 대량 발굴되어 신석기시대의 집단 거주지로 확인되었다.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 밤나무 밑에는 당시 발굴로 뒤집혀진 고인돌 1기가 남아 있고, 주변의 밭에서는 깨진 토기 조각들이 쉽게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소골'을 『정감록(鄭鑑錄)』에 나온 난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중의 한 곳으로 보기도 한다.
“五 之下 三峙之中 千人生活(오며의 아래에 삼치의 한가운데 천씨 성을 가진 사람은 살아남는다)”고 했는데, 오며(五 )는 노며(魯 ), 수며(水 ), 갈며(葛 ), 하며(下 ), 지며(芝 )이고 삼치(三峙)는 운치(雲峙), 점치(点峙), 독치(獨峙)로 모두 현존하는 지명이다.
『정감록』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소골에는 몇 년 전 까지 천(千)씨 성을 가진 세 가호가 살았으며 지금은 한 가호만 살고 있다. 소골에는 한때 20여 가호 40여 명의 주민이 있었으나 지금은 6가호 20여 명 만이 밭농사 등을 지으며 살고 있다.

소골앞 소
소골 입구 소골상회 앞에 있는 소(沼)다. 칠족령 아래로 흐르는 너른 강 아래에 있으며 쏘가리, 팅바우, 괴리 등의 물고기가 많이 산다.

소동 나루
소골에서 제장으로 건너가는 나루터로 소골상회 앞에 있었으나 소골 주민들이 줄어들면서 골덕내로 옮겼다. 오랜 옛날부터 소골에서 평창땅을 오갈 때 소동 나루를 이용했다. 지금은 제장에서 포도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오감을 쉽게 하기 위해 강 양쪽을 잇는 줄을 이어 놓았다.

고인돌
소골 한가운데 있는 선사시대 지석묘다. 너비 1m 40cm의 상석으로 길옆에 있었으나 1990년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면서 밤나무 밑에 뒤집어 놓은 채 방치되어 있다.

칠족령(七足嶺)
소골 앞에 병풍처럼 쳐진 벼랑 위의 고개로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뉘룬으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었다. 일설에는 제장 마을에서 옻을 끓이던 이진사 집의 개(犬)가 발바닥에 옻을 묻혀서 고개 마루턱을 오라다니며 발자국을 남겼다고해서 옻 칠(漆) 자, 발 족(足) 자를 써서 '칠족령'이라 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본래는 절벽을 이루며 삐죽삐죽하게 대나무 순처럼 솟은 고개가 일곱이라 해서 칠죽령(七竹嶺)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으나, '칠족령'(七足嶺)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도 보면 산허리를 산맥(山脈)으로, 산기슭을 산족(山足)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소골 쪽으로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여러 굽이의 산기슭을 상징 수인 '칠'(七)로 보아 '칠족령'(七足嶺)으로 부른 것이다.

향교골
소골 고인돌 뒤쪽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생쥐골
소골상회 위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이 작고 좁아 '생쥐골'이라고 한다.

배비랑산
소골 앞으로 뻗은 칠족령의 본 산인 백운산(白雲山)을 사투리로 발음해 부른 것이 '베비랑산', '배구랑산'으로 되었다.

말씹굴
소골 앞 깎아 지른 듯 한 칠족령 벼랑에 나 있는 자연동굴이다. 멀리서 보이는 동굴 입구가 말의 음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깊이를 알 수 없다.

가매소
소골 위쪽에 있는 소(沼)다. 바닥이 석회암반이라 마치 가마솥처럼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였다가 흐른다고 해서 '가매소'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큰'이라는 뜻을 지닌 '감'과 '소'에 중간에 매개모음을 개입시켜 '가마골'로 된 것이 변해 '가매소'가 되었다. 지명 앞에 붙는 '가마' '가매'등의 말은 '지형이 가마솥 같아'라는 수식어가 아니라 '크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매소'는 '큰 소(沼)'라는 뜻이 된다.

소통 여울
소골 북쪽에서 흐르는 물길이다. 여울이 좁고 긴 것이 마치 소 여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소통여울'이라고 한다.

중바닥 여울
운치리 점재(点峙)아래에서 나리소까지의 긴 여울이다. 기암절벽을 옆으로 하고 길게 흐르는 여울로 깊이가 한길이 넘지만 옛날에는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라고 해서 중바닥 여울이라고 했다.

나리소
    소골 동쪽 벼랑으로 굽이도는 큰 소를 말한다. 가수리쪽에 흐르는 동강 물길이 벼랑에 막혀 휘돌면서 큰 소를 이루어 놓았는데 강변의 기암절벽과 소나무와 어울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나리'는 '날'에서 온 옛말로 '흐르는 물', 즉 '내'(川)나 '강'(江)을 뜻하는 말이었다.《악범동동》(樂範動動)에도 "정월인(正月人) 나릿 므른 아으어져 녹져 搭立(정월의 냇물은 아 녹거나 얼거나 하는데)"라는 말이 나온다. 또 옛말에 '아래로 움직인다'(下動)의 뜻을 가진 '  '이라는 말이 연철 되어 '나리'로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리소'는 물이 깊고 조용한 까닭에 소를 둘러싼 절벽 아래에 굵기가 한아름되는 이무기가 살면서 물 속을 오간다는 얘기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물에 잠긴 소의 절벽 아래에 있는 굴에 큰 물뱀이 살면서 해마다 3-4월이면 운치리 점재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30여 년 전 읍내 사람들이 나리소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 꽝(다이너마이트)을 터뜨리자 온 강물이 붉어지고 뱀동가리로 보이는 살점이 떠내려갔다고 한다. 최근 들어 나리재에서 바라보이는 나리소의 아름다움을 찾아 서울 등지에서 많은 답사 여행 단체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용가
나리소 건너 소나무밭에 이르기전 깨끗한 모래가 펼쳐져 있는 강변이다. 옛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용가'라고 하는데, 6.25 직전까지 지금의 소나무 밭에는 마을 주민들이 밭을 일궈 콩이나 옥수수 등을 재배하기도 했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온 용(龍)은 뿔 달린 머리, 비늘로 덮인 굵은 뱀 모양의 몸통,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4개의 다리, 내나 강이나 호수 등지에서 살며 춘분 때 하늘로 올라가 추분 때 땅에 내려오는데, 자유롭게 공중을 날면서 비구름을 몰아 풍운 조화를 부린다고 전해 오고 있다.

돌채골
나리소 옆 용가에서 백운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다. 골짜기가 돌로 이루어져 '돌추이골'이라고 한 것이 변해 '돌채골'이 되었다. 가래나무, 더덕이 많은 골짜기로 알려져 있으며, 1995년 돌채골 위 백운산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어 아직도 수목 사이에 앙상한 소나무들을 볼 수 있다.

바리소
나리소 아래에 있으며 하류로 흐르던 물이 빠져나가 형성된 소(沼)의 형태가 놋쇠로 만든 밥그릇인 바리와 닮았다고 해서 '바리소'라고 한다. '바리'는 오목 주발과 같으나 입이 좁고 중배가 나온 주발이다. 주변에 둘러 쌓인 암반 때문에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인 '바리소'는 소가 깊고 고기가 많아 낚시꾼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제장(堤場)
덕내 동북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일설에는 큰 장이 서던 곳이라고 하지만, 물굽이에 의해 형성된 지형이 마당처럼 평탄하게 생겼다고 해서 '제장'이라고 한다. 마을 앞으로 물이 휘도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고인돌과 같은 청동기 시대 유적과 적석총 등 초기 철기시대 유적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 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수년 전에는 마을 뒤쪽에 큰 절이 들어선다는 얘기가 나돌던 곳으로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로 넘어가던 길이 나 있었다. 양지바른 마을로 토양이 좋아 당도가 매우 높은 포도를 재배하는 농장이 있다. 지금은 4가호 1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옥수수, 감자등의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재골
제장 마을 앞으로 난 골짜기다. 재를 넘어 영월로 다니던 골짜기라고 해서 '재골'이라고 부른다.

치재
재골 위의 고개다. 일설에는 옛날 치가 떠내려와서 생겨난 지명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금새 둥지
제장 앞 강물이 굽이도는 절벽 꼭대기에 있는 황새 둥지다. 오래 전 벼랑 끝에 금새라고 하는 황새 한 쌍이 주먹만한 돌을 물어다가 진흙과 섞어 둥지를 만들고 살았다. 그 무렵 일본 순사의 앞잡이였던 한 사람이 총으로 쏘아 황새 한 마리를 잡자 남아 있던 수컷 한 마리는 며칠을 울다가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도 벼랑 위에는 돌로 만든 황새 둥지가 보인다.

하방소
제장 아래로 흐르는 소다. 물굽이가 심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내며, 고성리산성 위에서 바라보면 영어 알파벳 S자를 연이어 놓은 듯 제장 서쪽의 작은 벼랑, 바새 서쪽의 중간 벼랑, 연포 남쪽의 큰 벼랑이 겹쳐진 듯 보인다. 고성리산성 서쪽 망루 자리에서 보면 하방소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바새
제장 남쪽에 있는 마을로 덕내에서 물레재를 넘어서면 이르게 되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모래사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소사'(所沙)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히 모래가 있다고 해서 모래 사(沙)자를 붙였다기보다는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순 우리말 지명에 단순히 '사'(沙)를 취음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마을 남쪽 강변에는 지름 1m가량 뚫린 땅 속에서 솟아 오르는 샘이 있다. 지금은 6가호 18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삼형제 바우
바새 아래쪽에 있는 바위다. 큰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해서 '삼형제 바우'라고 부른다.

베르메
'연포'라는 지명이 생기기 전 순 우리말 땅이름이다. 마을 앞을 휘돌아 흐르는 강이 낭떠러지인 '베루'여서 '베르메'라고 불렀으나,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한자를 취하면서 '연포'로 바뀌었다.

연포(硯浦)
바세 남쪽으로 강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동강이 휘돌고 그 신병산(神屛山) 벼랑이 둘러쳐져 있다고 해서 '연포'라고 한다. 물가의 낭떠러지도 '벼루' 또는 '베루'이고 먹을 갈 때 쓰는 도구도 '벼루' 또는 '베루'라고 부르다 보니 벼랑의 뜻이 연(硯)자로 취해진 것이다. 지금부터 40여년 전 까지만 해도 정선에서 내려오던 골안 떼꾼들을 상대로 하던 객주집이 있었으며 술시중을 들던 여자도 많을 때는 한집에 열 명이 넘었다. 신동읍에서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학생 수가 다섯명 남짓한 예미초등학교 연포분교가 있으며 7가호 20명의 주민들이 옥수수, 감자 등의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베틀굴
바세 서쪽 강건너 절벽에 있는 굴이다. 옛날 임진왜란 때에 마을 사람들이 피난해 굴 안에다 베틀을 옮겨 놓았다고 해서 '베틀굴' 이라고 한다.  

칼봉
연포 남쪽 신병산 자락의 봉우리로 뾰족하게 솟은 모양이 칼과 같다고 해서 '칼봉'이라고 부른다.

작은봉
칼봉 왼쪽의 봉우리다.

큰봉
칼봉 오른쪽에 있으며 봉우리가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쇠메기
큰봉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말한다. 강물의 수심이 너무 깊어 옛날 강가에서 풀을 뜯어먹던 소를 메기가 끌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 생긴 이름이다.

도둑굴
연포 마을 남쪽 강 건너에 있는 굴이다. 옛날 도둑이 마을에서 소를 한 마리 훔쳐가 다 잡아먹을 때까지 몰랐을 정도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거부기(龜浦)
연포 북쪽에 있는 마을로 '구포'(龜浦)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형국이 거북이가 물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인 금구입수형(金龜入水形)이어서 '거부기'라고 하며 영월 가정(柯正)나루 건너편 망르이다. 현재 2가호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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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동강아리랑』, 2000, 수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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