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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고성리의 지명  
 
 

고성리(古城里)




 신동읍 소재지에서 구레기고개를 넘어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방마을 앞 산에 테뫼형의 옛성(古城里山城)이 있다고 해서 '고성리'(古城里)라고 전해져 내려 왔다.
 고성리산성은 물론이려니와 고림(古林)의 소나무밭, 창마을(內倉)의 느티나무, 고성분교 옆의 대형 지석묘 등을 놓고 불 때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리는 본해 평창군 동면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59년)에 정선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동면에 편입되었다. 옛날 평창군에 속해 있을 때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균세(均稅)를 징수하여 보관하던 동창(東倉)이 있을 정도로 가호(家戶)수도 많았다.
 현재 신동읍내에서 가장 다양한 역사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주민들의 의식도 남달라 해마다 고성산성제를 열어 성곽 보존 운동과 관광 상품화를 동시에 모색하고 있다.
 주요 성(姓)씨로는 전의 이(李)씨, 전주 이(李)씨, 정주 현(玄)씨 등으로 행정 2개리에 70여가호 250여 명의 주민들이 창마을(內倉), 고림(古林), 고방(古芳), 자르메(柄山), 새나루(新津), 물추이(水村) 등지의 마을에서 고추, 고랭지 채소 등의 밭농사를 주로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쌀골
수촌 맞은편 산자락에서 서쪽으로 난 골짜기다. 자르메(柄山)와 덕천리 덕내로 넘어갈 수 있으며 지대가 높고 골이 깊어 산골 아래에서는 골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쌀골에는 일제시대 의병들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의병들이 쌀골에 은거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수비대가 고성지역을 드나들던 엿장수를 위협하고 구슬려 골짜기로 찾아 들었다. 의병들이 저녁식사를 할 무렵 골짜기 안 쓰러진 고목 뒤에 숨어 있던 수비대가 총을 쏘며 기습하자 의병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골짜기 위로 쫒겨 올라갔다. 의병들의 전근대식 무기인 화승총으로는 일본 수비대의 현대식 무기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쫒겨 올라가던 십여 명의 의병들은 총에 맞아 모두 죽고 한 명만 가까스로 고개를 넘어 자르메로 쫒겨 내려왔다. 어둑어둑할 무렵이라 자르메 마을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쫒겨온 의병을 숨겨 주어 목숨을 구했다. 쌀골에는 6.25사변 전까지 3가호가 살았으나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을 몰아냈다. 그 뒤 부터는 숲이 우거져 십여년 전 어떤 사람이 엄나무 껍질을 나흘 동안 벗겨 돈을 벌었다고 한다.

물골
창마을 남쪽 요골과 쌀골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골 위쪽에 있는 커다란 신배나무 밑동 근처에서 맑은 샘물이 흘러 '물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물을 이용해 골 위쪽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농사를 짓는다.

요골
창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짜기 안에 숲이 우거지고 충충해서 마을 주민들은 물론 나물 뜯는 사람들까지 들어가기를 꺼린다고 해서 '요골'이라고 부른다. 협곡과도 같은 골 안에는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특히 살모사 등의 뱀이 많다고 한다. 골짜기 너머로 이어지는 덕천리의 골짜기도 '요골'이다.

창마을(內倉)
고성리 중심지에 있는 마을로 '내창' , '창터'라고 한다. '창마을'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고성리지역이 평창군에 속해있을 당시에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균세(均稅)를 징수하여 보관하던 곡창(穀倉)인 동창(東倉)이 있어서 생겨났다. 옛날 창고가 있었던 자리는 확실하지 않으나 밭머리 곳곳에 불에 구운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600여년이 월씬 넘은 듯한 20여미터 높이의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군수방공한칠여세불망비'(郡守方公漢七永世不亡碑)와 '고성구장공덕비'(古城區長功德碑)가 서 있다. 몇 년 전 까지 예비군 무기고가 있었고 간이 음식점, 약방 등이 있어 한때 50여 가호가 살았으나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23가호 4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등의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국골
창마을 뒷산에서 북쪽으로 난 골짜기다. 골짜기로 가는 곳곳에 구릉(邱陵)처럼 평평한 곳이 많아 '구골'(邱谷)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국골'로 변했다.  

국골굴
국골 해발 300m지점에 있는 자연동굴이다.  울창한 수목 사이로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이 동굴은 입구가 넓고 웅장하며, 굴 안을 들어서면 서쪽과 북쪽으로 가지굴이 나 있다. 깊이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6.25사변 때 고방마을 주민들이 난을 피하던 곳으로 굴 안에 물이 있다고도 한다. 이 동굴 속에는 수천년 된 이심이(이무기)가 산다는 얘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푯대봉
창마을 불쪽 해발 724m의 봉우리로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가 우리의 농토를 수탈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때 땅을 측량하기 위하여 산봉우리에 삼각 기점을 잡고 푯대를 박은 곳이다.  운치리 돈니치와 고성리 고방과 내창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들띠
창마을에서 북쪽 푯대봉을 향해 난 골짜기 안에 있다. 골 안에 넓은 분지가 있어 '들덕'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들띠'로 되었다.

덕새
창마을 뒤 들띠에 있다. 골 안쪽으로 산등이 평평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석회암이 빗물에 용식되어 침식작용을 일으키면서 넓은 평지밭을 이룬 따을 '덕시'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변해 '덕새'가 되었다.

신배나무골
창마을 북동쪽으로 난 골짜기다. 옛날 골 안쪽에 아름드리 신배나무가 많이 있어서 '신배나무골'이라고 부른다.

자르메(柄山)
창마을에서 서쪽으로 덕내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낀 산세가 자라가 엎드려있는 형국이어서 '자르메'라고 불렀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 행정구역 개편을할 때 순 우리말 이름인 '자르메'를 한자(漢字)로 바꾸면서 '병산'(柄山)으로 불렀다. 지금은 8가호 30여 명의 주민들이 고추 등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송솔밭
자르메 서남쪽으로 산자락 아래에 소나무가 많아 '송솔밭'이라고 했다. 송솔밭 아래쪽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밭을 일구어 고추, 옥수수 등을 재배하고 있다.

새나루(新津)
창마을 동쪽 골 안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3가호 7명이 살고 있다. '새나루'라는 이름은 마을 아래쪽에 언젠가는 새로운 나루터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 예언성 지명(豫言性地名)이다.  실제로 1972년과 1990년에 남한강 하류 지방에 큰 홍수피해가 있자 충주댐 만으로는 홍수조절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부에서는 오는 2천년 초반까지 높이 98m, 길이 18m, 저수 용량 6억 5천만톤 규모의 댐을 영월읍 거운리 만지(滿池)에 건설하기로 했다. 댐이 완성될 경우 고성리로 들어차는 물이 새나루 바로 아래까지 와 나루터가 생길 것이라고 하는데, 먼 훗날을 내다보고 땅이름 하나 하나까지 지은 옛 사람들의 슬기로움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덧재
새나루에서 운치리 돈니치로 넘어가는 고개로 '큰재'라고도 한다. '덕'은 '큰 언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덕재'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덧재'가 되었다.

굵은 병
창마을과 고방마을 사이에 있는 둔덕처럼 생긴 산자락이다. 석회암 벼랑이 뭉툭하게 길 옆으로 드리워져 '굵은 병'이라고 한다.  '병'은 '벼랑'이다.

고방(古芳)
창마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성리 산성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고방'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5가호 20여 명이 살고 있다.

고방정(古芳亭)
고방마을 앞에 있는 정자다. 20여 년 전 주민들이 지은 것으로 울창한 숲과 어울려 운치를 더해 준다.

큰먹골
고방마을에서 고성분교 쪽으로 가 서쪽으로 고성리 산성을 오르는 골짜기다.  옛날 큰 먹구렁이가 사는 앞산에 오르는 골짜기라고 해서 '큰먹골'이라고 한다. 해마다 고성산성제를 치르몀ㄴ서 길이 잘 단장되어 골 안쪽에 있는 밭까지 트럭이 올라갈 수 있다. 큰먹골을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고성리 산성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왼쪽으로는 자르메로 넘어가는 산능선 길이 있다..

성재(城峙)
고방마을에서 서쪽으로 큰먹골을 따라 올라가 덕천리 골덕내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 근처에 고성리 산성이 있다고 해서 '성재'라고 부른다.

작은 먹골
고방마을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골짜기다. 먹구렁이가 산다는 앞산을 오르는 작은 골짜기라고 해서 작은 먹골이라고 부른다.

고성(古城里山城)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고방마을 앞산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축성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고구려가 남진을 하면서 전초 기지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요새로 추측된다. 5-6세기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해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을 펼쳤는데, 고성을 끼고 있는 지역은 영서지방의 평창군에서 영남지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한강 상류를 따라 남하하면서 충북 영춘에 온달산성을 전진기지로 삼고 영월 뱃나들이의 대야리산성, 정양리의 왕검성, 삼옥리의 완택산성, 신동읍의 고성리 산성을 연결해 한수유역을 확보하려고 애를 썼다.  해발 720여미터가 되는 산을 중심으로 띠를 두른 듯이 쌓은 테뫼형 산성인 이 성은 북쪽으로 남은 약80m의 성곽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고 동쪽과 서쪽은 이에 비해 외벽과 내벽이 무너져 있다.  축조 방식은 장방형의 모가 난 큰 돌을 아래에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10-15도 정도 기울여 쌓는 물림 쌓기 방식으로 쌓았는데, 성을 연속해 쌓지 않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 네곳의 공간에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 위에서 보면 동쪽의 강 상류가 눈에 훤히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구레기 고개, 서쪽으로는 굽이도는 강줄기가 눈에 들어와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성 안에서 밭을 일구다가 여러 개의 돌화살촉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 매년 고성리와 가까운 덕천리. 운치리 주민들이 힘을 모아 고성산성제를 열러 성곽 보존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최근 들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는 곳이다.

고인돌
고성분교 뒤 밭 한가운데에 있다. 선사시대 지석묘로 너비 2m의 상석을 1m 되는 지석이 고이고있어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상석에는 성혈이 30여군데 눈에 띄며 이미 오래 전에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상석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지석은 하나만 완전하고 밭에서 나온 돌로 밑이 채워져있다. 고성리 주민들은 상석에 있는 많은 성혈을 두고 옛날 고성리를 다스리던 귀족의 묘나 장군의 묘라고 믿고 있다.

나리재
고방에서 운치리로 넘어가는 나리소 옆의 작은 고개를 말한다. 지금은 고성리에서 운치리, 가수리로 통하는 도로가 나 있다. 예전에는 지금의 길 아래쪽에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 고개를 넘다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곡을 세 번하고 떨어져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나리소 어귀까지 그늘을 드리우던 그 버드나무는 오래 전 병자년 수해 때 떠내려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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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동강아리랑』, 2000, 수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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