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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가사리의 지명  

 

가사리(佳士里)




읍소재지인 예미리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평창군 동면 지역으로 고종32년(1895년)에 정선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동읍에 편입되었다.
'가사리'(佳士里)라는 지명은 골짜기의 산세가 선비가 은거하며 살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지만 가장자리를 뜻하는 '갓'(邊)이 '가사'로 전음 되어 '가사'(佳士)라는 한자가 취해졌음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옛날부터 경상도 영주에서 꼬치재를 넘어 정선으로 가는 길이 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며 일제시대 때는 수많은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어 골짜기마다 철과 구리, 아연 등의 광물을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근래에는 많은 석회광이 들어서 보기에도 흉할 정도로 삼림이 훼손되어 골짜기마다 이름만큼 그대로 남아 있거나 보존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38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지대가 높은 까닭에 읍소재지와는 다른 기온 차이를 보이고 가사리에는 마차(磨 ) 피실, 황정골, 머드레이(遠坪), 원가사(元佳士), 남애(南崖), 두리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현재는 40가호 143명의 주민들이 옥수수 감자 고추와 고랭지 채소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마차
마차재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 벽암산(霹巖山)에서 뻗어 온 산세가 옥녀가 앉아 머리를 빗는 형국인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어서 '마차'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옥녀산발형국은 명당자리라고 하는데, 마차재에는 지금의 주유소 아래 어딘가 '구늪지지 팔판대지'라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오랜 옛날 이곳에는 연안 김(金)씨들이 처음 정착해 살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촌수가 높은 어른이 죽자 정암사(淨巖寺)주지스님이 와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 주지스님은 묘자리를 잡아 주고 돌아가면서 연안 김씨 네명의 아들에게 땅을 파되 넓은 돌이 나오면 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은 묘자리를 파내려 가다가 돌을 들어 버리자 학(鶴) 한 마리가 날아올라 갔다고 한다. 묘자리에서 학이 나온 것을 학국산수형 이라고 하는데, 장례를 치르고 나서 묘자리를 잡아 주었던 정암사의 주지스님이 그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안 김씨들은 기운이 쇠해 이곳을 모두 떠날 것이고, 아마도 수백 년이 지나 밤나무가 산을 이루게 되면 돌아올 것이요……"
그 스님의 말처럼 그때부터 김씨들이 하나둘씩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후 지금의 마차재 휴게소 맞은편 산에는 산밤나무가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산밤나무가 숲을 이루면 학이 찾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 연안 김씨는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몇 해전부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 가운데 '구늪지지 팔판대지'가 어디쯤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밤나무가 숲을 이룰 때 연안 김씨들이 돌아온다는 그 스님의 예언이 과연 사실로 나타날지 자못 궁금한 일이다.

마차재
가사리에서 정선군 남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정선 태백으로 통하는 38번 국도가 지나는 곳으로 1992년 도로포장 공사가 완공되기까지는 굽이굽이 험한 고개였다. 마차재 도로포장 공사는 20여년 전부터 국회의원 출마자들의 단골 공약 메뉴여서 선거 때만 되면 '마차재는 동네북'이라는 말이 나돌곤 할 정도였다.
고도가 높아 봄에도 눈발이 흩날리는 날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옛날에는 고개 서쪽으로 운치리 설론(雪論)으로 통하는 길이 나 있어 탄맥을 찾기 위해 자동차들이 오가기도 했다.
지금은 10여가 호의 주민들이 상업과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마산등
마차재휴게소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다. 산능선의 모양이 말(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십여년 전까지 만해도 그 아래에 10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1가호만 살고 있다.

동점골
마차재휴게소 뒤로 난 골짜기다.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구리를 캐서 성형하던 점터가 있던 골짜기라고 해서 '동점골'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구리를 캐던 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곰봉(熊峰)
마차재 서쪽에 있는 높이 1,015미터의 산이다. 30여년전 사냥꾼들에 의해 포획되기 전까지 큰 곰이 살았다고 해서 '곰봉'이라고 한다지만 사실은 크고 높은 봉우리라고 해서 곰봉 이라고 불렀다.
산이 깊어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산나물, 야생화들도 많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곰봉'으로는 오랜 옛날부터 운치리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탄맥을 찾아 오가던 사람들도 인해 생긴 길이 숲만 무성한 채 아직까지 남아 있다. 1963년 울진 삼척으로 침입한 무장공비가 이곳으로 도주하면서 신동지역 예비군들과 대치해 예비군 한 명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곰거치굴
곰봉 정상 봉우리에 있는 굴로 곰이 거처하던 굴이라고 해서 '곰거치굴'이라고 부른다.

머드레이
두리곡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 안이 넓고 평평해서 '머드렁'이라고 부른 것이 변해 '머드레이'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 지명들이 개편되면서 '원평'(遠坪)이라는 한자식 지명으로 바뀌었으나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머드레이'라고 부른다.
옛날 골안 황장골에 철광을 개발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며, 36번 국도 변에서 머드레이로 들어가는 입구 산기슭에는 일제시대 아연광산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11가호 30여명의 주민들이 주로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황정골
머드레이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일명 '황장골'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속이 누런 빛을 띄는 오래 묵은 큰 소나무로 왕실이나 양반들의 관(棺)으로 쓰이던 황장목(黃腸木)이 많은 골짜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신빙성이 없다. 오히려 큰 골짜기라는 뜻의 '한골'이 발음상의 이유로 '황골'로 변하고, 그곳에 철광이 있었다고 해서 '황점골'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황정골'이 되었다.

공동묘지골
38번 국도를 따라 마차재 휴게소에 이르기전 왼쪽으로 난 골짜기다. 골 안에 일제시대부터 이곳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리골
원가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꼭대기가 두루뭉실한 두리봉으로 통한다고 해서 '두리곡'이라고 했다. 골짜기에는 현재 4가호가 살고 있으며 골 안쪽 산 위에서는 성우석회가 석회석을 채광하고 있는데 정상 부근에서 작업을 하다가 발견된 종유석과 석순, 석화가 있는 동굴이 훼손된 채 남아 있다.

새골재
가사리에서 조동리 새골로 넘어가는 고개다.

원가사(元佳士)
가사리의 본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폐교되어 방치된 가사분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행정지역 정리 당시 초대 가사리 이장이 이 마을에 거주했다고 해서 '원가사'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은 3가호 10여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피실
원가사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시절이 어수선하던 때에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피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옛날 밭곡식으로 비교적 구황농물(求荒農物)에 가까운 '피'가 산지나 경사지에 많았다고 해서 '피실'로 불렀다는 게 좋을 것 같다. '실'은 마을을 뜻한다. 예전에는 5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입구에 1가호만 살고 있다.

고재골
원가사에서 새골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재가 높은 골짜기라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고재'는 '골재'가 변한 땅이름으로 골짜기와 재의 뜻이 복합된 말이다. 고재골 꼭대기에 오르면 조동6리 부대골로 내려가는 길과 살개골로 내려가는 길로 갈린다.

새덕
원가사 안쪽에 있는 마을로 골과 골 사이의 마을이라고 해서 '새덕'이라고 부른다. '덕'은 여진족의 말로 '비탈, 고원, 언덕' 등을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진족 말의 영향을 받아 이 글자가 산지 지명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막골
원가사 북동쪽 안에 있는 골짜기다. 예전에 이 곳에 정착한 화전민들이 막(幕)을 치고 농사를 지었으므로 '막골'이라고 한다. 막골을 넘으면 매화동으로 통한다.

남애(南崖)
원가사 입구를 지나 38번 국도 서쪽 높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오래 전부터 운치리 돈니치와 터골에서 가사리로 통하는 길이 나 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이 가사리가 보이는 정상에서 남쪽 가파른 고개를 바라보면 낭떠러지 같다고 하여 '남애'라고 했다. '애(崖)'는 물가 벼랑에 붙어 있는 낭떠러지나 산지 언덕을 뜻한다. 일제시대에 가사리 부자가 살았다고 하는 이곳에는 지금 2가호가 살고 있다.

합숙
38번 국도에서 두리곡으로 들어가는 길 맞은 편에 있다. 일제시대 두리곡에 금광을 개발하면서 노무자들의 숙소가 있던 곳으로 지금은 다소 훼손된 채 남아 있다. 숙소 건물 앞으로는 비닐하우스가 지어져 있으며 지금은 3가호가 살고 있다.

지게바우
합숙 아래 국도 변에 있는 바위다. 비스듬히 선 큰 바위를 지게 작대기와 같은 긴 바위가 고인 듯 서 있다고 해서 '지게바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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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정선 신동읍 지명유래』, 1996, 정선아리랑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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