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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방제리의 지명  

 

방제리(防堤里)




본래 평창군 동면 지역으로 고종32년 (1895년) 정선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가 우리땅을 수탈하기위해 실시한 행정구역 통폐합때 매화동, 원방제, 새비재를 한데 묶어 '방제리'라고 했다.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함백산(咸白山)의 연맥으로 두리봉 산자락에 예로부터 고목이 우거져 마치 제방림을 형성한것 같다고 해서 '방제리'라 했으며, 1950년초 함백광업소가 두리봉 일대에서 무연탄을 캐내기 전까지 화전(火田)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하던 산간 벽지에 불과 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흑진주의 꿈을 쫓아 외래인구가 급증하면서 설령, 미륵, 역전 등의 마을이 생겨나 경기가 좋아지자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인생의 막장과 같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던 이들은 갑작스런 함백광업소의 폐광으로 또다른 삶을 살아가기위해 뿔뿔이 떠나 방제리의 북적이던 마을 곳곳은 썰렁한 모슴으로 남게 되었다.
폐광이후 행정리수도 4개리에서 3개리로 줄어들었고, 146가호 407명의 주민들이 주로 밭농사 등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다래산
안경다리 장재터 뒷산이다. 산속에 초여름에 흰꽃이 피었다가 가을에 열매가 달리는 다래나무가 많아 '다래산'이라고 했다.
함백광업소가 들어서기 전까지 다래산은 물론 지금의 안경다리 일대는 온통 다래덩굴이 밭을 이룰 정도로 우거졌다고 한다. 또 다래산에는 싸리나무가 많았는데 광업소가 번성할 무렵인 1970년대 말 다래산에서 잘라온 싸리빗자루를 최고로 칠 정도였다.

장재터
다래산 아래로난 태백선 철도 위쪽에있는 산마을이다. 옛날부터 신동읍에 정착한 부자(장자)들이 살던 곳이라고해서 장자(長者)터라 했는데 그 말이 변해 '장재터'가 되었다.
장재터 윗쪽으로는 봉분은 가라앉았지만 비석과 좌대를 갖춘 김해김씨(金海金氏)묘들이 많이 남아 있는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처음 정착한 부자들은 김해 김씨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백광업소가 한창일때는 20가호가 넘게 살았고 변전소도 들어섰으나 지금은 방제1리 이장 현성주씨외 3가호 13명이 살고 있다.  

벌미리
장재터가 위치한 곳의 땅이 평평하고 산 위에 있었으므로 '벌메'라고 한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벌미리'가 되었다.

미구렁
장재터 위쪽에서 다래산을 넘어 새골로 넘어가는 길이 난 곳으로 주변에 봉분이 가라 앉고 잡초가 무성한 김해김씨 묘가 많아 '묘구렁'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미구렁'이 되었다. 지금은 오가는 이들이 없지만 십여년전까지는 미구렁으로 난 길을 넘어 새골과 가사리를 오가기도 했다.

설통바우
장재터 위에 있다. 예전부터 토종벌을 받기 위해 바위 밑에 설통(벌통)을 세워 두었던 곳이므로 '설통바우'라고 한다.

웃덕감배기
함백역 위 함백광업소 종합저탄장이 있던 곳으로 언덕 위에 있는 평지라고 해서 '웃덕감배기'라고 한다. 광업소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주민들이 밭을 일궜으나 지금은 경석이 잔뜩 쌓여 있다.
'배기'는 '박다'의 명사형이 변한 말로 '서 있는 곳'이라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이다.

아래 덕감배기
웃덕감배기 아래에 있다고 해서 '아래덕감배기'라고 한다. 함백광업소에서 탄을 쌓아 두면서 옛모습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미륵골
함백역 북동쪽 골 안에 있다. 대한불교 태고종 미륵암(彌勒菴)이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골 안쪽에 함백광업소 항목장이 있었으며, 이 골짜기를 통해 앞으로 남면 자미원까지 421번 지방도가 개설될 예정이다.

부처골
미륵골에 암자가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아직도 노인들은 미륵골을 '부처골'이라고 부른다.

미륵
함백역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마을 앞 동쪽 골 안에 대한불교 태고종 미륵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한때 20가구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3가호 8명이 살아가며 대부분은 빈집으로 남아 있다.

천부터
미륵 뒷산 자락에 있는 평지다. 정확한 지명의 유래는 확인할 수 없다.

둔들배기
미륵 위 산자락에 있는 평평한 땅이다. 땅이 평평한 곳이라고 해서 '둔들배기'라고 하는데, 예전부터 돼지, 염소, 닭 등을 키우던 곳이기도 하다.

덕쇠
함백광업소 선탄장 위쪽으로 언덕 위 넓은 평지밭(坪田)에 있다. 언덕에 둘러 쌓인 산등이 평평하다고 해서 '덕시'라고 부른 것이 변해 '덕쇠'가  되었다.
석회암이 빗물에 용식되어 침식되면서 지표에 웅덩이 모양의 와지(窪地)가 형성되는 돌리네(doline) 현상으로 생겨난 언덕 위의 땅을 '덕' 또는 '덕시'라고 한다.
예전에는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람은 살지 않고 오르내리며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둔박골
미륵 위 지금의 조동신호장역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다. 산비탈인 둔덕 위에 밭이 있었다 해서 '둔밭'(屯田)이 '둔박''으로 변했다. '둔밭'에서 '둔'(屯)은 '둥글다'의 뿌리 말이며 '둔밭'은 밭이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점재
둔박골에서 새골 개간지로 넘은 고개다.

조동역(鳥洞驛)
함백역 북쪽에 있으며 1976년 9월18일 착공되어 같은 해 12월24일 준공되었다. 1977년 4월1일 열차의 교행과 대피를 위해 신호장으로 역장 외 7명이 역무를 시작했다. 그후 1989년부터 조동신호장(鳥洞信號場)으로 격하되어 지금은 일반 계원 4명이 근무하고 있다.

속갱이재
둔박골 위쪽에서 가사리 원가사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부터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솔갱이재'라고 부른 것이 변해 '속갱이재'가 되었다.
'솔갱이'·'솔보득이'등은 소나무의 정선 사투리다.

아랫방제
조동역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웃방제 아래쪽에 있다고 해서 '아랫방제'라고 하며 지금은 10가호 30여명의 주민들이 주로 고랭지 채소 등을 재배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랫방제에는 함백초등학교 매화분교가 있었으나 1996년 폐교되었으나 1998년 정선군 폐교활용 문화공간화 사업 계획에 따라 정선아리랑학교로 바뀌어 매년 수많은 내외국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마을 아래에는 2백년생 엄나무, 문들레나무, 소나무, 다름나무가 함께 고목을 이룬 마을 수호목이 있어 매년 정월 열나흘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분단산
아랫방제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유래는 알 수 없다.

구리재
아랫방제 남쪽에 있는 고개다. 전하는 말로는 산꼭대기까지 9리가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옛날 호환(虎患)이 심하던 시절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이 이 재를 '구레미재'·'구레재'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구리재'가 되었다. '구레미'란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이 호랑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구리재 골 안에는 물이 흘러내려 십여년 전 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말바우
아랫방제 남쪽 조동신호장 아래 있는 굴다리를 빠져 나가기전 오른쪽에 있는 바위로 그 모양이 말(馬)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말바우'라고 한다. 말바우 주변에는 드릅나무가 많았으며 예전에 그 바위 밑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다가 지금은 방제3리 역전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말바우집 할머니라고 부른다.

샘골
아랫방제 북서쪽으로 난 골짜기로 골 안에서 맑은 샘물이 흐른다고 해서 '샘골'이라고 불렀다. 가사리 원가사로 넘어가는 길목이기도 한 이 골에는 십여년전 까지만 해도 한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샘골농장에서 부치는 너른 밭이 있을 뿐이다.

절골
아랫방제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에 절이 있던 골짜기라고 해서 '절골'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깨어진 기와 조각 등 흔적만 숲속에 남아 있다.

노갈봉
아랫방제 북쪽 샘골과 둔박골 사이에 솟은 봉우리다. 산의 모습이 곡식을 쌓아 놓은 가리처럼 생겨 '노가리봉'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노갈봉'으로 변했다.

웃방제
아랫방제 위쪽 수리재터널 인근에 있는 마을이다. 십여년전만 해도 20여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4가호가 고랭지 채소 등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만평짜리
웃방제 맞은편 산에 형성된 큰 밭이다. 산등에 일군 밭의 크기가 만평을 넘어 '만평짜리'라고 부른다.

물골
웃방제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 안쪽에서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물골'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독사, 살모사 등의 뱀이 많이 서식해 해마다 가을이면 원주 제천 등지의 땅꾼들이 많은 뱀을 잡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수리재
웃방제와 정선군 남면 문곡리 자미원을 가로막은 험한 고개다. 북쪽에 있는 해발 1,059m의 죽염산(竹簾山)연맥으로 수리가 많이 서식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인근에서 가장 뾰족하고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고개라고 해서 '수리재'라고 불렀다. 수리재 남쪽으로는 자미원역으로 통하는 수리재터널이 뚫려 있다.

수리재터널
수리재 밑을 관통하는 터널이다. 태백선 철도가 놓여 있으며 터널을 빠져나가면 남면 자미원역에 이른다. 현재 국가보호물로 지정되어 터널 양쪽 입구에 경비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큰덕쇠
웃방제 북쪽에 있다. 골 안쪽의 산등이 크고 편편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덕'은 산 위에 있는 평밭을 일컫는 말로 '덕' 또는 '덕시'라고 한다.

천사밭골
큰덕쇠 왼쪽 철탑 밑에 있는 골짜기다. 일설에는 골 안쪽에 천사의 날개 모양을 한 밭이 있다 해서 '천사밭골'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진밭골
큰덕쇠와 작은덕쇠 사이에 있는 골짜기다. 골짜기 안쪽으로 밭을 일구다 보니 밭모양이 길어져 '진밭골'이라고 불렀다. 이곳 주민들도 '진밭골'의 밭이 길기만 하고 얼마나 폭이 좁은지 "소를 돌리면 마치 맞다"고 말한다. '진'은 '긴'의 사투리다.

작은덕쇠
진밭골 옆에 있다. 수리재터널 위 낙엽송밭 아래로 산등에 작은 평밭이 있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호래이바우
작은덕쇠와 만평 짜리 위에 있는 바위다. 옛날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만, 바위 모양이 호랑이가 누워 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호래이바우'라고 한다. 여름에는 숲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늦가을부터는 잘 보인다.
호래이바우 아래에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무덤인 호식총이 있다고 하는데 마을 노인들은 "뭐가 있긴 있다"하며 아직도 이 바위 근처에 가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새벌
웃방제 북쪽 문바우와 큰덕새 사이에 형성된 평지이다. 산능선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으므로 '새벌'이라고 부른다.

도둑눔터
새벌 동쪽 산능선 안에 있다. 산에 깊게 가린데다 움푹한 지형이어서 오래 전 수리재를 넘어 자미원에서 넘어온 도둑들이 이곳에 한동안 머물며 새벌에 있는 감자밭을 몽땅 털어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매화동(梅花洞)
웃방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빼곡한 산에 둘러 쌓인 마을의 지형 지세가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어서 '매화동'이라고 불렀다. 오래 전부터 화전민들이 정착한 매화동에는 최근 5년전까지만 해도 십여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떠나거나 읍내로 이사를 가 꼭대기 솟대배기 아래에 1가호만 살고 있다. 읍내로 이사를 간 사람들도 농사철만 되면 매화동에 들어와 고랭지 채소 등 밭농사를 지으며 살기도 한다.

고무골
매화동 꼭대기에서 서북쪽으로 난 골짜기로 높은 곳에 있는 큰 골짜기라고 해서 '고무골'이라고 불렀다. 옛날 이 골을 넘어 마차재를 거쳐 정선으로 통하던 길목이기도 했다.

솟대배기
매화동 끝 고무골에 있으며 옛날 솟대를 만들어 세워 둔 곳이어서 '솟대배기'라고 한다.
솟대의 유래는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신성불가침 지역인 소도(蘇塗)에서 시작되었으며 긴 막대 위에 오리 모양의 새를 조각하여 앉혀 놓은 것이다.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마을에서 나오면 동구 밖에다 붉은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푸른 나무로 용을 새긴 용머리 솟대를 세웠다.
이곳의 솟대는 지금부터 30여년전까지만 해도 있었으나 길이 나면서 없어졌다. 솟대의 재료는 비바람에 강한 15자(4∼5m)정도의 소나무 낙엽송으로 만들었으며 그 수명이 다하면 마을 사람들이 솟대 당고사를 지낼 때 만들어 세웠다.

버드나무골
매화동 꼭대기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난 골짜기로 가사리재 아래에 있는 골짜기다. 옛날 버드나무 고목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새덕재
설통바우가 있는 곳에서 가사리로 넘어가던 고개다. '덕'은 '큰 언덕'을 뜻하는데 큰 언덕 사이를 넘는 재라고 해서 '새덕재'라고 한다.

서낭뒷골
매화동 꼭대기 마을에서 버드나무골로 올라가는 중간에 있는 골짜기다. 옛 성황당 뒤로 오르는 골짜기라 해서 '서낭뒷골'이라고 한다.

설통바우
매화동 버드나무골 절벽 아래에 있는 바위로 옛날부터 바위 밑에 통나무로 만든 토종 벌집인 설통을 많이 갖다 놓아 붙인 이름이다.

설통바우너미
버드나무골 설통바우 위를 넘어가는 길이다.

재피골
매화동 남서쪽 버드나무골과 서낭뒷골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나무껍질을 벗겨 밧줄이나 지게줄을 만들기 위해 재피질을 하던 곳이므로 '재피골'이라고 한다.

삼산번디기
고무골과 굼밭골 사이에 있다. 그 아래에 볼록한 산봉우리가 셋이 있고 그 아래로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기에 '삼산 펀디기'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삼산번디기'가 되었다.
'펀디기'는 '평지'라는 뜻으로 '번들'이라는 말과 같다.

굼밭골
매화동 꼭대기 고무골 동쪽에 있다. 골 안쪽이 우묵하다(굼이졌다)해서 '굼밭골'이라고 한다.

텃골안
삼산번디기와 굼밭골 사이 맞은편에 있다. 옛날 매화동에 들어온 사람들이 터를 이루고 살았던 골짜기 안쪽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중골
선바우골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골짜기로 옛날 스님이 점말재 고봉을 넘어 다니던 골짜기라고 해서 '중골'이라고 한다. 중골 아래에는 스님이 빠져 죽었다는 중소거랑이 있다.

중소거랑
중골 밑에 있는 소(沼)로 옛날 이곳을 지나던 어떤 스님이 소 옆 바위에 앉아 쉬면서 이(蝨)를 잡다가 꾸벅 조는 바람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와 '중소거랑'이라고 한다. '거랑'은 '도랑'으로 '작은 내'라는 뜻이다.

선바우골
중골과 문바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골 안쪽에 10m정도 높이의 뾰족하게 선 바위가 있어 '선바우골'이라고 한다. 선바우골 주변에는 귀한 산나물인 석유황이 많다고 한다.

문바우
중골 동쪽에 있다. 산마루에 커다란 문(門)처럼 생긴 큰 바위가 우뚝 서 있어 '문바우'라고 불렀다.

피아골
문바우 맞은편에 있으며 매화동에서 웃방제를 넘는 골짜기다. 옛날 난리때 이 골짜기로 사람들이 들어가 난을 피하였다고 해서 '피아골'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골 안까지 채소밭이 있다.

자작나무배기
문바우와 피아골 사이로 난 길목에 있었다. 옛날에 자작나무가 많이 있던 곳이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매봉재
매화동에서 웃방제로 넘는 피아골 위쪽의 산이다. '매봉'이란 그 주위에서 봉우리가 높고 뾰족한 산을 말한다.

안터
안경다리에서 보면 골 안쪽 산능선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안터'라고 했다. 예전에는 여러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한 가호만 살고 있다. 땅이 기름져 고랭지 채소 등을 재배하는 곳이다.

단곡(檀谷)
안경다리를 지나 두리봉으로 오르는 골 안쪽의 계곡을 말하나 지금은 구 방제갱 입구 위쪽에서 권양기실이 있던 곳 아래까지의 계곡을 말한다. 옛날부터 주변에 박달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계곡 양쪽으로 빼곡하던 박달나무는 함백광업소가 탄광을 개발하면서 아름드리 고목은 바둑판 장식용 응접세트 등을 만들기 위해 잘려 나가고 작은 나무들마저 곡괭이 자루 등으로 잘려 나가 지금은 계곡 이름만큼 박달나무가 흔하지는 않다.
두위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는 이 계곡은 해마다 여름과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마곡
단곡계곡 위 구 함백광업소 권양기실이 있던 곳의 계곡을 말한다. 산줄기 모양이 소가 엎드려 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므로 소 마구간에 해당하여 원지명을 '마굿'이라고 하였다.
1914년 일제가 토지측량을 하면서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의 음이나 훈을 차용하여 포기하는 과정에서 '마굿'이라는 고유지명이 '마곡'(麻谷)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일설에 마곡은 곡식을 까부는 기구인 치 형국인 데다 뒷산 줄기가 여물을 씹어 삼키는 와우형국(臥牛形局)이어서 재물이 한데 오래 머물지 않으므로 돈을 번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시루골
단곡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마곡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다. 골 안쪽에 시루처럼 움푹 파인 와지(窪地)가 있어 '시루골'이라고 한다.

두리봉
백두대간 태백산의 연봉으로 정선군 남면 문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1466m의 두리봉은 그 산자락이 신동읍 방제리와 영월군 상동읍에 걸쳐 있으며 철쭉으로 이름난 산이다. 국립지리원에서 펴낸 지형도에는 두위봉(斗圍峰)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오랜 옛날부터 이 일대 사람들은 정상 부분의 산마루가 두루뭉실하다고 해서 '두리봉'이라고 불렀으며 두리봉 능선에 모두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오봉산(五峰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 이름의 유래가 말해 주듯 비교적 산세가 순한 이 산은 자미원쪽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신동읍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마주하는 곳에서부터 정상까지 6월 초순이면 꽃잎이 크고 연한 분홍빛  철쭉으로 뒤덮여 우리나라 5대 철쭉 명산에 꼽힌다. 또 최근에는 '월간 산'지 등을 통해 단곡위의 임도에서부터 질운산 동쪽까지 가을이면 기막힐 정도의 단풍 경치를 배경으로 한 산악자전거(MTB)코스로 적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겨울에는 광활한 설경으로도 이름나 있다.

감로수샘터
두리봉 중턱에 있는 샘터다. 1993년 제3회 두위봉 철쭉축제를 앞두고 등산로 정비를 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 주는 샘터로 이가 시릴 만큼 찬 물이 땅속에서 솟아나 온다.
샘터 아래쪽까지 함백광업소에서 탄전을 개발할 무렵부터 사용하던 임도가 숲에 가려져 있다.

아라리고개
두리봉 정상을 약1Km앞두고 팔부능선 아래에 있는 매우 가파른 고개 길이다.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능선을 향해 오르는 힘겨운 고개라고 해서 1994년 제3회 두위봉 철쭉 축제 행사를 앞두고 등산로 정비를 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새터골
현재 '아라리고개'라고 푯말을 써놓은곳 왼쪽 아래의 골짜기다. 옛날 화전민들이 새로 터를 일구고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새터골'이라고 부른다.

호식총(虎食塚)
두리봉 중턱 남쪽에 있다. 돌서덕 한 가운데에 높이 50cm되는 돌무덤으로 옛날 호랑이에게 물려 가 죽은 사람의 무덤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묘에는 시루를 덮어놓고 부지갱이를 찔러 놓는데,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귀신인 창귀(倡鬼)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두리봉에 있는 호식총에는 부지갱이는 없으나 지금도 돌무지 위에 깨어져 버린 시루 조각이 남아 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두리봉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이 많은데 마고할멈 전설은 깨어진 호식총과 맞물려 흥미를 더해 준다.
옛날 두리봉 안골(지금은 어디인지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음)에 마고할멈이 살았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깊은 산에는 호랑이가 살면서 사람을 해쳤는데, 새비재에서 이어지는 두리봉 안골에도 세가구의 화전민들이 모여들어 늘 호랑이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골짜기 동쪽 밭이랑 아래쪽에 여러 해전 열살 배기 어린 애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머리만 바위에 얹혀져 있어 돌무지로 덮어놓은 호식총이 있어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르는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은 더해 가기만 했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 곳에 사람들은 떡시루를 덮어 창귀가 빠져나와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했는데, 어느 날 화전을 일구던 마을 노인의 실수로 돌이 굴러 시루가 깨져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린 채 문을 꼭 걸어 잠갔으나 창귀는 마을과 산을 떠돌며 여러 명을 호랑이 밥이 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북 도사곡에서 올라왔다는 할머니가 지팡이 올무를 만들어 새터골(지금의 아라리고개라고 표시한 아래쪽)로 창귀를 유인해 돌무지에 가두었다. 그때부터 화전민들은 편하게 농사를 지었지만 이 할머니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화전을 일구던 사람들은 밤마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이 할머니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창귀를 막아 준 이 할머니를 마고할멈 이라고 했다.

두리폭포
두리봉정상 동쪽의 네 번째 헬기장에서 남쪽으로 난 호박골 골짜기에 있는 폭포다. 물이 많을 때는 높이가 약7m가량 되지만 골짜기로 사람이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다.

장군바우
두리봉 정상에 있는 바위다.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바위 모습이 천하를 호통하는 장군의 기개를 닮았다고 해서 '장군바우'라고 한다. 맑은 날 장군바우에 서면 정선의 가리왕산이 가물가물 보일 듯하고 동쪽으로는 사북읍 너머로 태백산 자락이 하늘과 맞닿아 멋진 스카이 라인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소백산맥 줄기가 보이고 방제리 산간 마을 풍경도 골짜기를 끼고 눈에 들어온다.

호박골
두리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내려와 네 번째 헬기장 남쪽으로 난 골짜기다. 옛날 남면 문곡리에 사는 아들에게 주려고 잘 익은 약호박 한 덩이를 이고 가던 할머니가 이 골 꼭대기에서 그만 호박을 떨어뜨렸는데 그 호박이 이 골짜기를 하루종일 굴러갔다는 전설에서 생겨난 지명이다.
경사가 급하고 길이 없는 골짜기로 비만 오면 골 안에 큰물이 흘러 폭포와 소(沼)도 생기고 산목련이라고 하는 함박꽃도 많이 자생한다.

새비재(鳥飛峙)
함백역 남쪽 질운산 자락에 형성된 고개다. 고개를 이룬 산의 형상이 새가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 하여 '새비재'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일설에는 6.25당시 아군 전투기가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골짜기와 능선이 겹겹으로 포개진 모습이 새가 날개를 질러 놓은 것과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몇년전까지만 해도 밭을 일구다 보면 불발탄 등 전쟁 당시의 흔적이 발견되곤 했다.
오래 전부터 화전민(火田民)들이 정착해 터를 일구고 살아왔으나 1970년초 정부의 독가촌 정비 사업으로 지금은 고랭지 채소 등을 재배하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다.
새비재를 넘어가면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한밭골(大田洞)에 이르러 안경다리에서 새비재로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도로를 '대전길'이라고 한다.
새비재 고갯마루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배경이 된 곳. 견우(차태현)와 그녀(전지현)는 그 나무 아래 타임캡슐을 묻었다. 영화속 애틋한 감동을 지우지 못한 관객들이 이따금씩 이곳을 찾아 노을을 바라보며 영화속 주인공이 된다. 전지현을 그리며 쉼없이 고갯마루를 오르던 견우와  뒤늦게 사랑을 확인하고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의 얼굴이 ‘오버랩’ 하는 곳이기도 하다.

설령
새비재 방제분교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이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설령'이라고 했다. 함백광업소의 채탄량이 증가하면서 광부가 늘어나자 기름을 먹인 나무로 사택을 지으면서 형성되었던 마을로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독가촌
새비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전략촌'이라고 한다. 오래 전 이곳에 정착한 화전민들이 질운산 자락 곳곳에서 밭을 일구며 살았는데, 1968년 북한 무장공비가 출몰하여 화전민을 학살한 사건이 있자 정부에서 집을 지어 주고 뿔뿔이 흩어져 살던 화전민 30여세 대를 집단으로 정착시켰으므로 생겨난 지명이다.
1990년 까지만 해도 여러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시사철 사람이 살지 않고 봄이면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게 위해 들어와 가을에 수확을 한 후 모두 떠나는 곳이다.

질운산
두리봉 정상에서 서쪽에 있는 해발 1171m의 산으로 영월군 중동면과 경계를 짓는 산이다. 산세가 완만해 오랜 옛날 이곳에 살던 화전민들이 이 산능선에 농사를 지으면 길하다고 해서 '길운산'이라고 한 것이 변해 '질운산'이 되었다. 바위가 많지 않고 땅이 기르져 산능선 일대에는 수만 평의 고랭지 채소밭이 펼쳐져 있다.

함백역(咸白驛)
함백광업소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불어난 여객과 석탄 및 화물을 운송하기 위해 1957년 3월10일 역사 신축 준공과 동시에 역무를 시작한 보통역이다. 함백광업소가 한창일 무렵에는 하루 이용객이 5백여 명이 넘고 직원도 16명이나 되었으나 폐광 이후 이용객이 급격히 감소해 1996년 무렵 하루 만원의 영업 수익도 올리지 못하는 날이 많자 폐쇄 또는 신호장으로 격하하자는 얘기까지 조심스럽게 검토되다가 1999년 폐쇄되고 현재는 보선사무소만 남아있다.있다.

역전(驛前)
함백역 앞에서부터 아래 개울 건너 쪽까지 형성된 마을이다. 1957년 3월에 함백선이 개통되면서 역앞으로는 대포집 등 술집이 들어섰고 개울 건너편 골목에는 술집 옷가게 전파사 도장포 등 온갖 상점이 들어서 큰 시장 경제권을 이루었다.
초저녁부터 불야성을 이루고 통행금지 시간 이전까지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던 이곳은 폐광 얘기가 나돌기 시작한 1980년 중반부터 서서히 퇴락해 1993년 함백광업소가 폐광을 한 후에는 폐허가 되다시피 되어 버렸다.

함백광업소
1993년 일본사람 고오끼(小木)에 의해 지질조사로 확인된 후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라는 일본인 회사가 개발에 착수하였다. 1948년 상공부령으로 광업권이 등록되었고, 동시에 상공부가 직할 운영하게 되었다. 1950년에는 6.25사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0년 11월1일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면서 함백광업소라는 이름으로 운영을 시작해 1993년 10월1일자로 문을 닫았다.
광원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1985년으로 2,083명이었으나 그때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폐광될 무렵에는 7백여 명에 불과했다.
함백광업소의 폐광이 가져다준 충격은 폐광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신동읍 지역은 물론 정선군, 영월군까지 엄청난 파장을 가져와 경기 침체가 지속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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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정선 신동읍 지명유래』, 1996, 정선아리랑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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