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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조동리의 지명  

조동리(鳥洞里)




본래 평창군 동면에 속해 새골 또는 조동(鳥洞)이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년)에 정선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구룡동 길운등지를 합하여 '조동리'라 하였다.
조동리는 읍소재지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죽염산(竹簾山), 직운산(織雲山)에 둘러쌓여 있고, 남쪽으로는 예미산(禮美山)에 둘러쌓여 있고 서북쪽으로는 수리봉이 솟아 그 아래로 석항천의 상류인 냇물이 흐르고 있다.
조동리라는 이름은 새비재(鳥飛峙)의 새떼가 매봉산의 매에 쫓겨 내려 앉는 형국이라 하고 일설에는 새가 알을 품고있는 형국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실제로 조동시장 서쪽 수리봉에 올라서서 보면 조동시장쪽을 향해 날아와 앉은 새의 날개자락 사이에 새골과 중앙안경다리가 둘러쌓여 있는 모습이다.
오래전부터 사방에 고목이 울창한 산으로 쌓이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살기좋은 고장이었으며, 지금의 시장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정착했다.
1950년대 초 함백광업소가 탄전을 개발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했으며 1970년대 부터는 중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곳이될 정도로 산중 도회지를 연상케하는 광산촌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에너지 수요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면서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 1993년 10월1일 함백광업소가 폐광되면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살던 조동리는 황폐화되기 시작해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게 되었고 중앙사택 새골사택도 아득한 기억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은 행정리도 13개리에서 10개리로 줄어들고 인구도 976가호 3,165명(1995년12월31일기준)에 불과하지만 예전의 번성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함백(咸白)
1933년 일본사람 고오끼(小木)가 황지의 진산인 1,573m 함백산(咸白山)의 연맥인 두리봉 일대에서 엄청난 양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한 이래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창립되고 방제리에 함백광업소가 채광을 시작하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당시 외지 유입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신동읍 조동리와 방제리는 광업소의 이름을 따 '함백'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함백'이란 지명의 근원이 되는 함백산은 실제높이가 태백산보다 높고 그 산자락에 우리나라 굴지의 탄광이 거의 모여있을만큼 무연탄 매장량이 풍부하다.
'크게 밝다'는 뜻인 '함백'(咸白)은 광업소가 문을 닫은 지금도 조동리와 방제리를 통칭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솔밭
구룡동 안쪽 골로 올라가 오른쪽의 직운산자락 만여평 일대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밭이 있어서 생겨난 지명이다.
몇년전 대부분의 소나무가 베어져 팔려 나가기 전까지 신동읍내 초중고등학교의 소풍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예전에는 솔밭 주변에 십여가호가 넘게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다.

골안
길운에서 안길운 성진광업소로 들어가는 도로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 안쪽까지 사람이 살던 마을이어서 '골안'이라고 부르며 지금은 10여가호 정도가 살고 있다. 골을 따라 올라가면 예미산 정상에 이를수가 있다. 현재 조동2리 경로당이 있는 마을이다.

절골
길운 장미주택을 지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 안쪽에 대한불교 태고종 용운사(龍雲寺)라는 절이 있어 생겨난 이름이다.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새비재로 가는 대전길이 나있고, 안경다리 쪽으로 돌아올 수 있어 등산로로 이용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골 안쪽까지 여러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덕말
길운 동쪽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언덕 위에 있어 언덕마을 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 덕마을이라 했고 다시 '덕발'이 되었다. 지금은 1가호만 살고 있다.

구룡동
조동시장 남쪽 아래 골안을 중심으로한 마을이다. 옛날 새골에 들어와 처음 정착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새로운 거처를 정하려고 지금의 구룡천(九龍川)을 지날 무렵 아홉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비가 쏟아져 그곳에서 정착했다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구룡동'은 본래 불교식 지명으로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2600여년전 화창한 봄날 출산을 하러 친정으로 가다가 룸비니의 어느 나무밑에서 휘장을 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때 하늘에서 아홉마리 용이 나타나 물을 뿜어 갓난아이를 목욕시켜 주었다는 '구룡토수'(九龍吐水)신화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개미촌
조동시장 남쪽 건널목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1972년 조동리를 휩쓸다시피한 대홍수가 난 후 수해민들을 위해 세운 수재민사택으로 실의를 딛고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자는 뜻으로 당시 군청 내무과장이 마을이름을 '개미촌'이라 지었다. 또 건널목 아래 마을 입구에 '개미촌'이라고 쓴 표석을 세우고 그 양옆으로 표석을 떠받치는 두마리의 커다란 개미 모형을 만들어 마을을 깨끗하게 가꾸기도 했다.
개미촌 뒤 논에는 신동읍에서 제일 큰 스케이트장이 있었는데 해마다 겨울이면 스케이트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달동네
구룡동 골 남쪽 구름 위에 있는 마을로 높은 곳에 위치해 달맞이를 제일 먼저 한다고 해서 '달동네'라고 했다.
길운 덕말로 통하는 길이 나 있으며 지금은 5가호 10여명이 살고있다.

간이역
함백광업소 탄전의 개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길운 구룡동 시장 일대에 거주하게되자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 지금의 구룡동 방아간 뒤에 있던 역이다.
예미에서 함백을 오가던 열차가 시멘트로 임시 승강장을 만든 이곳에서 정차했는데, 지금의 무인역과 같이 차장에게 요금을 내고 이용했다.
지금은 승강장터의 구조물만 약간 남아있고 사라진 이름이 되었지만, 한때 번성했던 조동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지명이다.

시장
조동리의 중심 마을이다. 함백광업소가 들어서고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가를 형성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신동읍 인구가 2만4천명을 넘어서던 1970년대 중반 무렵에는 골목골목마다 난전이 펼쳐지고 시장이 번성해 돈만 있으면 못사는게 없다 할 정도로 생활용품점, 술집, 유흥음식점, 예식장들이 즐비했다.

수리봉
조동시장 서북쪽에 있으며 조동리와 예미리의 경계가 되는 해발 677m의 봉우리다. 옛날 산위에 수리(鷲)가 서식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사실은 순 우리말 '수리'에서 나온 이름이다.
사람의 머리 윗부분을 정수리라고 하듯이 '수리'란 '높은곳'을 뜻하는데, 우리말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수리메' 또는 '수리봉'으로 불렀다. 실제로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마을 앞뒤의 뾰족 솟은 산을 수리봉으로 부르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조동리를 배경으로 우뚝 솟은 수리봉 정상에 거의 이르러 우뚝 선 '사자바우'에 올라서서 보면 조동리와 방제리가 한눈에 들어 온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높이 1m정도의 작은 돌탑이 있고, 정상에는 방송수신용 중계탑이 서있다.

사자바우
수리봉 정상 아래 능선에 있다. 조동시장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모양이 마치 사자가 앉아있는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서 보기와는 달리 바위에 오르면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 다섯평 남짓 넓적한 반석이어서 휴식을 취하기에도 좋고, 새골과 중앙 안경다리를 날개로 감싼 새의 형국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옛날부터 이 바위 주변으로 진달래가 많이 피었지만 참꽃문뎅이가 있다 해서 어린이들이 무서워하던 곳이기도 하다.

도둑바우
조동시장 남쪽 산능선에 있다. 직경 5m정도 되는 모난 바위 뒤에 옛날 도둑이 숨어 살았다해서 '도둑바우'라고 한다. 한때 갓난아기가 죽으면 묻는 애창터로 삼았는데 바위 주변에는 아직도 돌무더기들이 남아있다.
전하는 말로는 숲과 나무에 가려 삐죽 솟아있는 바위 모양이 도둑이 남의 집 넘보듯 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이 바위 밑에는 길이 3m, 굵기 10cm정도되는 누런 구렁이가 살고 있으며 비가온뒤 갠 날이면 나타난다고 한다. 실제로 이 구렁이를 이심이(이무기)라 하며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읍내에는 많이 살고 있으며, 얼마전엔 이 구렁이를 찍기 위해 서울에 있는 한 학술단체와 사진작가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유신촌(維新村)
현재 함백초등학교 아래서부터 함백파출소 뒤에 있는 마을이다. 1972년 신동읍을 휩쓸다시피한 홍수가 난 후 안경다리의 용화촌, 구룡동의 개미촌과 함께 수해민들을 위해 지은 주택이 들어선 마을이다.
박정희대통령 집권당시 낡은 것을 새롭게 고치라는 유신(維新)에서 따온 말로 당시 군청 내무과장이 지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명명된 '유신촌'은 널리 사용되지 못한채 '수재민사택'이라고 전해 내려왔다.

효자바우
함백 파출소앞 성황당 윗쪽 봉우리에 있는 바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바위모양이 노모를 엎고있는 아들 모습이어서 '효자바우'라고 하는데, 함백초등학교교문에서 보면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도 바위에는 수십년전 누군가가 써놓은 '효자바우'라는 검은색 페인트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새목이
함백초등학교 옆 지방도 옆에서 라멘교아래 구(舊)극장 옆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길이다. 조동시장으로 뻗은 산세가 새의 형국인데 그 목에 해당되는 곳에 난 고개길이어서 새목이라고 불렀다. 몇해전 까지만해도 어린이들이 병정놀이 등을 하며 자주 오르내리던 고개다.

중앙(中央)
조동시장과 안경다리 사이에 있었던 함백광업소 종업원들의 집단 거주지를 말한다. 광업소가 들어서고 전국에서 흑진주의 꿈을 쫓아 사람들이 몰려들자 풀밭이었던 곳에 사택을 지으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1972년 수해 전까지 현재 오미아코리아공장이 들어선 곳엔 큰 연못과 예비군훈련장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벽돌로 지은 신사택이, 신사택 아래로는 기름먹인 나무로 지은 구사택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또 구사택 아래로 지금의 정선균이연구소 남쪽 교회 위에 큰 종합병원이 건립되어 조동리 중심마을이 되기도 했다.
1972년 수해로 구사택과 병원 등이 떠내려가거나 훼손되어 구사택자리와 연못이 있던 예비군 훈련장 자리에 한 동에 다섯가구가 사는 사택 백여동을 다시짓고 '중앙사택'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3년 10월1일 함백광업소가 문을 닫자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떠나게 되었고 빈집으로 남아있던 사택은 모두 헐려버리고 지금은 석회석 가공업체로 다국적 기업인 오미아코리아주식회사와 유진철망, 정선균이연구소가 들어섰다.

옹기점터
새골 이씨 묘 앞 구릉에 있었다. 석영 장석 따위의 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분해된 점토(粘土)가 많았던 곳으로 옛날부터 물동이, 소래기 등을 만들던 옹기점이 있었으므로 '옹기점터'라고 불렀다.
옹기는 진흙만을 초벌구이해 만든 윤이나지 않는 질그릇과 유약인 오짓물을 발라서구운 오지그릇을 통틀어 말하며 그 종류와 기능도 다양하였다. 간장을 담는 큰대독, 된장 막장을 담가놓는 중두리독, 장아찌 등을 담아놓는 작은 항아리 등이 있으며, 그외에도 뚝배기, 시루, 소줏고리, 물동이, 술독, 화로, 장군, 굴뚝, 소래기 등 사용 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이곳에 있던 옹기점에서는 주로 장독과 물동이, 시루 등을 많이 만들었는데 1960년대 후반 함백광업소 사택과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후 옹기점터 위에서는 함백광업소가 폐광될때까지 광원 월급이 나올 때마다 큰 장이 서곤 했다.
옹기점터가 사라진지 30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엔 석회석을 가공해 탄산칼슘을 만드는 공장인 한국오미아 주식회사가 들어서 옛지명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물땅고
함백여중고 위에서 구 복지회관 건물에 이르는 곳에 있었다. 길운 정수장이 세워지기 전까지 땅에서 물을 뽑아 올려 중앙사택 주민들의 식수를 공급해주던 곳이다.
 땅속에서 솟은 물을 저장할 수 있게 콘크리트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 '물탱크'를 '물땅꼬'라고 불렀다. 물땅꼬 둘레로는 높이가 30m가 넘는 아름드리 미류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1972년 조동리 일대를 휩쓴 수해로 매몰된데다 길운 정수장이 세워져 덕천리에서 끌어들인 동강물을 정수해 식수를 공급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서 나오던 물을 이용해 송어양식장이 들어서있다.

상여골
함백여중고 바로 뒷산 철길 너머에 있는 골짜기다. 1980년대 중반까지 조동리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상여를 둔 집이 산자락 아래에 있어 생긴 이름이다.
십여년 전까지만해도 산에 올라 병정놀이를 하는 어린애들이 많았지만  음산한 기분 때문인지 상여집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골짜기 위쪽으로는 1970년대 함백초등학교 통일동산으로 무궁화를 심고 가꾸었으며 하루종일 해가 들고 봄이면 산벚꽃과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아름다운 골짜기다.

솔밭길
함백중앙교회 뒤쪽에서 산넘어 솔밭에 이르는 길이다. 함백광업소가 한창일 무렵 산마루 위 큰밭 주변과 산넘어 절골에 살던 십여가구의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으며 함백초, 중학교 등에서 솔밭으로 소풍을 갈때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길 옆 작은 골짜기로는 물이 흐르고 산마루부터는 큰 밭과 낙엽송 밭이 있었으나 아름드리 낙엽송밭은 잘려나간 밑둥 흔적만 남아 있다. 지금은 오가는 사람이 드물어 길 중간쯤 부터는 잡초가 우거져 있다.

물레방아터
오미아코리아 공장 남쪽 함백선 철도변에 있었다. 예전에 큰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곡식을 찧었으므로 '물레방아터'라고 한다. 1972년 수해때 20여가구의 초가집과 함께 마을 대부분이 떠내려가면서 사라졌고 지금은 철도변에 흔적만 남아 있다.

철도변촌
함백광업소와 함께 함백선 철도가 개설 되면서 철도변에 형성된 마을로 한국오미아 공장 옆 함백선 철도너머에 있었다. 1970년대 후반 까지만 해도 10여가호가 살았으나 광업소사택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없어지고 지금은 우물터만 남아 있다.

새골
조동(鳥洞)의 본 이름으로 산의 형태가 꼭 새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지금부터 약 3백여년전 어느 선비가 태백산맥을 따라 지나가다가 지금의 새골과 중앙을 가르는 산의 모습이 봉황새가 둥지에서 알을 품고있는 형국인 봉소포란형(鳳巢抱卵形)이어서 '새골'이라 부르고 한자로는 '봉동'(鳳洞), '조동'(鳥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는 논이 없어 지붕을 이으려고 해도 볏짚으로 잇지 못하고 산에서 자생하는 샛대를 베어다가 이었는데, 샛대를 이은 주막이 지금의 함백파출소 앞에 들어서고 그 주변으로 마을을 이루었다.
새골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본이 경주(慶州)파인 이(李)씨 들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다 이곳에 찾아들어 본을 아예 새골 이씨로 바꾸고 이 고장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어 조와 옥수수, 산나물로 끼니를 이어가던 새골 이씨들이 뿔뿔이 흩어진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설로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이곳에 정착한 새골 이씨들 가운데 이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진사는 무척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성품이 좋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없이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도 마침내 가난에 못이겨 죽고 말았다.
어질고 착한 이진사가 죽자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묘를 잘써야 이씨들이 번창한다고 하며 좋은 터를 정해 장례를 치렀다. 얼마전까지 중앙사택이있던 길가의 양지바른 곳이었다.
이진사가 묻힌 곳은 거북이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인 금구입수형(金龜入水形)이어서 그곳에 묘를 정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후 이곳을 지나가던 한 스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묘자리는 참으로 좋으나 앞 연못에 물이 마를 것이고 뒷산으로는 철마(鐵馬)가 지나가게 될텐데……"
한참동안 사방을 둘러본 스님은 계속말을 이었다.
"물이 없는 거북은 죽은거나 다름없고 생기를 발현하는 꼬리가 잘리니 발복(發福)할수 있는가. 뿔뿔이 흩어지고 말지"
그러자 스님의 중얼거림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넓은 연못이 마를리 없고 윗산으로 철마가 지나갈리 없다는 생각에 삿대질을 하며 등을 돌린 스님에게 욕을 했다.
"재수없는 중 같으니……"
그로부터 백여년쯤 지나 탄맥이 발견되면서 스님의 말은 맞아 떨어졌다.
마을이 있던 곳에 삼거리(함백파출소앞)를 자르게 되었고 얼마뒤 태백선 기차길을 내면서 새의 목덜미를 잘라버려 더이상 날아갈 수 없는 봉황새의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진사의 묘 뒤로는 기차길이 나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고 앞 연못도 1972년 홍수가 난 이후 광업소 사택을 짓기위해 매립해 버렸다.
크게 번창한 나날을 보내려던 새골 이씨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새골 이씨들이 정착했던 이야기는 이와같은 전설로만 전해 내려온다. 새골에 있던 경주 이씨들의 누각도 사라졌고, 이진사와 그 후손들의 묘만 중앙에 쓸쓸히 남아 석회석 공장의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밝은밭
조동시장 북쪽 마을로 라멘교 아래쪽에 있다. 철도가 개설되기 전 명당자리로 앞에는 작은 냇물이 흐르고 하루종일 해가드는 마을이라고 해서 '밝은밭'이라고 했다.
마을 뒤 안골로 들어가면 수리봉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밝은밭골
밝은밭 뒷 골짜기로 수리봉 옆으로 난 능선을 넘으면 방충메기 앞 골로 넘어간다. 토질이 좋아 골 안쪽까지 마을 주민들이 밭을 일군다.

과장사택
조동시장 북쪽 종합운동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함백광업소가 문을 열고 채탄량이 증가하면서 광업소 과장 항장등 고급간부들과 가족들이 거주하는 사택이 들어서서 생겨난 이름이다. 광업소가 폐광이 되면서 지역주민들이 증개축해 사용하고 있으며 마을 이름을 새로 짓기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금은 19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애매골
과장사택 안쪽으로 들어가 구 객실 앞에서 왼쪽으로 난 골짜기다. 오래전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싸리나무, 옥수수대궁 등으로 외를 엮은 움막을 짓고 살았다해서 '외막골'이 '애막골'로 변하고 다시 '애매골'로 변하였다.
애막골 안쪽에는 전나무숲이 우거져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었는데, 지금은 천주교 공원묘지가 들어서있다.

부대골
과장사택 안쪽 구 객실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진 골짜기다. 지역예비군 훈련장으로 쓰였던 곳으로 최근에는 신동읍 지역의 궁인(弓人)들이 활을 쏘는 활터인 미석정(美石亭)이 있는 곳이다.
부대골 둘레 산중에는 머루덤불이 많았으며, 가사리로 넘어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벌밭(坪村)
지금의 새골 구아파트와 주공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곳의 옛이름이다. 평평한 버덩위에 형성된 마을이라고해서 '벌밭'이라고 했는데 , 지금 주공아파트 자리에는 큰 운동장이 있었다. 벌밭 일대에는 2층짜리 아파트 여러 동이 지어지면서 지명만 간간히 전해져 내려왔다.
'벌밭'은 조동리에서 시장 다음으로 활기가 넘쳤던 마을로 1970년  초반까지 구 아파트 벽을 스크린으로 삼아 광부가족들을 위한 무료영화를 상영하기도 했고, 함백광업소가 한창일 무렵 각 항별.과별로 경쟁을 벌이는 광업소 체육대회가 벌밭 운동장에서 열리면 조동리 전체가 들뜬듯 활기가 넘치기도 했다.

벌말
새골 구아파트와 주공아파트가 들어선 곳의 옛 지명이다. 아파트가 들어서기전 까지만 해도 넓고 평평한 땅으로 논과 밭이 많아 '벌마을'이라고 부른것이 줄어 '벌말'이 되었다.

재피골
새골 구아파트 건너편 도로 왼쪽에있는 골짜기다. 골짜기 안쪽에 커다란 재피나무들이 많아서 '재피골'이라고 했다. 재피나무는 산초나무 비슷하게 생긴 나무로 재피는 후추와 비슷하며 향신료로 쓰인다.
재피골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20여년전 벼락을 맞아 부러져버렸다.
함백광업소가 번성하던 무렵 사택이 모자라게 되자 골 입구에서 안쪽까지 사택이 빽빽하게 들어섰던 곳으로 폐광이 되면서 모두 떠나고 지금은 1가호만 남아 있다.

계장사택
새골 구 아파트 위에 있는 마을이다. 함백광업소 계장들과 가족들이 거주하던 마을로 광업소가 폐광된 후 이주해온 주민들이 사택을 증개축하거나 신축해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가호 명의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새매골
예전에 새골연탄공장이 있던곳에서 북서쪽으로 난 골짜기다. 골짜기 어귀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온다고 해서 '새미(샘)골'이라고 했는데 변해서 '새매골'이 되었다.

살개골
새골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난 골짜기로 가사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었다. 일설에는 옛날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골'이 '살개골'로 변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골 모양이 흡사 방아다리인 살개처럼 생겨서 '살개골'이라고 했다.

다래골
새골유아원이 있던 곳에서 동쪽 다래산 자락으로 난 골짜기다. 골짜기 위로 초여름 흰꽃이 피었다가 가을에 황록색 열매가 달리는 다래덩굴이 많아 마을 어린애들이 종다래끼를 가지고 다래를 따러가던 곳이므로 '다래골'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여러가구가 살았던 골짜기로 산을 넘으면 방제리 장재터에 이른다.

개간지
새골 꼭대기 동쪽 산능선에 형성된 밭을 이른다. 30여년 전까지만해도 삼림이 우거졌으나 산능선을 깍아 수만평의 밭을 새로 일궜다고해서 '개간지'라고 불렀다. 지금은 배추 등 고랭지채소를 재배한다.

새골재
개간지에서 방제리 둔박골로 넘어오는 고개다.

용화동
예전에 함백광업소 항목장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조동7리 일대를 이른다. 1972년 큰 수해가 나자 당시 이장이었던 이모씨가 "용이 화가나서 비가 왔다"고해 수해민 사택을 지으면서 마을이름을 '용화동'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용화촌
조동7리 본마을로 성은교회 아래쪽에 있다. 1972년 수해로 많은 집들이 유실되자 수해민들을 위해 주택을 지으면서 '용화촌'으로 불렀다. 마을 입구에도 '용화촌'이라는 표석을 세워놓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수재민사택'이라고 불렀다.

점촌
안경다리에 이르기전 오른쪽으로 철길건너 대전길 아래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쇠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던 점터가 있었다고 해서 '점촌'이라고 한다.
점터는 대개 산능선에 지형이 움푹하게 생긴곳을 택하여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진흙으로 용광로를 만드는데 참숯등을 사용하여 쇠를 녹인다. 쇠를 녹이는 일을 전부리 또는 점부리라 하고 쇠를 녹이는 곳을 점터라고 한다.
이곳사람들은 쇠를 녹이는 점터가 있던 점촌이 최근들어서는 점(占)을 보는 점촌이 되었다고 우스개소리를 한다. 실제로 점촌의 17가구 가운데 네가구가 무당집이어서 점촌(占村)이라는 말은 지명의 또다른 변이 쯤으로 여길 수도 있다.
점촌에는 함백광업소가 한창일때까지만해도 백여가호가 넘게 살았는데 폐광이후 대부분 떠나가고 지금은 17가호만 살고있다.

대전길
안경다리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쪽으로 푯대봉 중턱을 가로지르며 난 길이다.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새비재를 지나 영월군 중동면 직동리 한밭골(大田洞)에 이르게 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에는 직운산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실은 제무시트럭이 오갔고, 1980년 중반까지만해도 함백광업소 직운항이 있어 광부들을 태운 통근버스가 이 길을 오갔으나 지금은 고랭지채소 수송차량 등만 오가는 한적한 길이되어 버렸다.

 항목장
안경다리 아래쪽에 있었다. 함백광업소탄전이 개발되면서 갱도 동발용 등으로 수송한 통나무를 쌓아두었던 곳으로 1972년 수해가 난 후 수재민사택을 지으면서 미륵골로 옮겼다.

푯대봉
점촌 뒷산 봉우리를 말한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수탈하기위해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대대적으로 실시했던 토지조사 사업때 토지를 측량하기위해 푯대를 세웠다. 이곳도 그무렵 일본인들에 의해 산봉우리에 삼각지점을 잡은 푯대가 세워졌으므로 '푯대봉'이라고 한다.
봉우리 부근에는 곰취, 곤드레등 산나물이 많고, 봉우리 아래에서 흐르는 샘물은 점촌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된다.

점터
점촌 아래쪽에 있었다. 옛날에 쇠를 녹여 호미 낫 부지깽이 등을 만들던 점터가 있었다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안경다리
함백광업소가 개발되고 함백역에 이르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놓인 다리가 쌍굴로 안경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다리를 지칭했으나 주변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쓰이게 되었다. 다리 아래 한쪽으로는 물이 흐르고 다른 한쪽으로는 차가 다닐 수 있어 예전까지 함백광업소 본관, 방제항, 자미항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방아소
안경다리 버스정류장 뒤쪽 개울에 있다. 지금은 쇠로 만든 다리가 놓였으나 30여년 전까지만해도 디딜방아대를 놓고 소(沼)를 건너다녔다고 해서 '방아소'라는 이름이 생겼다.
옛날 마을 노인이 거대한 바위로 둘러 쌓인듯한 소의 깊이를 재기위해 돌을 매단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 넣었더니 끝이 닿지 않고 모두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광업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팔뚝크기만한 메기도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넙적한 바위가 깊게 파여있는 소의 모양이 그대로 있으며, 소 옆으로는 샘물이 흐르고 있다.

갈미소
방아소 아래에 있는 조그만한 소(沼)다. 그 형상이 비가 올때 갓 위에 덮어쓰는 갈모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갈모소'라고 부른것이 변해 '갈미소'가 되었다.

천제단터
방아소 옆에 있었다. 예전에 가뭄이 계속되거나 하지(夏至)에 비가 오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돼지머리를 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해서 '천제단터'라고 부른다. 방아소 옆을 '천제단'은 그후 미륵골로 옮겼다가 지금은 장재터아래 산당(山堂)에 있다.

사스레골
함백중고등학교 아래쪽에서 남쪽으로 난 골짜기다. 일설에는 골 안쪽 성릉사(成陵寺)입구에 큰 사시나무가 있었다고해서 부른 이름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던 밭이 한 버덩으로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있던 사슬밭이 있어 '사스레골'이라고 한다.

진밭
함백중고등학교 아래 지방도변 산장가든 위쪽으로 있다. 가파른 능선 위로 밭이 길게 치솟아 있다고 해서 '긴밭'이라 한것이 '진밭'으로 변했다. 밭 꼭대기 위에는 비가 온뒤 해가 나는 날이면 지름이 10cm가량 되는 구렁이가 나타난다고 한다.

방충메기
예미리와 조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마루 근처로 도로옆 하천에 물을 막기위해 상보(上保)로 쌓은 방축(防築)이 있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일설에는 조동으로 가는 지방도를 낼때 산자락을 터 길을 내고 절개지에 시멘트 벽을 쌓자 그 모양이 제방을 쌓은것과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지만, 물을 막기위해 쌓은 '방축'에서 생겨난 이름이 맞다.
예전에 신동읍에는 농업용수로 끌어쓰기위해 세곳에 보가 있었는데, 상보는 방축메기며 중보는 예미다리위 재건촌 옆에 연못처럼 자연스레 보가 형성되었으며 하보는 예미4리 아래쪽에 새물보라고 해서 있었다.
'방축'(防築)은 '방죽'으로도 발음되며 '메기'는 산마루의 잘룩한 부분을 말한다.

예미산생수
방축메기 근처에 있는 샘물이다. 본래 함백중고등학교 아래쪽 성황당 옆으로 흐르던 물이었으나 1992년 함백상록회에서 수도관으로 물을 끌어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거북이상을 만들어놓고 주변을 단장했다.

명주바우
예미산 생수터 위쪽 벼랑에 있는 바위다. 토종벌들이 떼로 몰려드는 곳이어서 바위 밑에 벌통을 놓았는데 주인이 바뀌면서 벌통을 넘겨받은 사람은 명주 두필을 권리이전금조로 전 주인에게 주었다고 해서 '명주마우'라고 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벌통과 명주를 바꾼 명주바우 얘기가 많은데,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 숲속은 일제시대 초기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길운(吉雲)
예미산자락 아래서부터 함백중고등학교위까지 형성된 마을이다. 옛날 밭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들이 안길운 꼭대기의 개비덕 봉우리에 구름이 끼면 곧 비가 내려 농사가 잘 되었다고 해서 '길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길운은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특히 함백광업소가 생기면서 지금의 장미주택 자리에 목조사택이 지어지는등 번성하며 인구가 크게 늘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안길운
길운 안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부터 예미산자락 아래 점토광을 중심으로해서 그 일대에 형성된 마을을 가리켰다.
1910년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아연광은 1983년부터 철광석을 생산하는 신예미광업소로 바뀌어 지금은 국내 유일의 철광이기도 하나 값싼 철광석이 중국으로부타 수입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염묘산(連墓山)
안길운 동남쪽에 있는 해발 921m의 산이다. 산 정상에서 보면 봉우리가 묘(墓)를 연이어 놓은것 같다해서 '연묘산'이라 한것이 변해 '염묘산'이 되었다. 이산으로는 영월군 중동면 이목리 상유전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으며 숲이 우거져있어 지금은 산나물 채취꾼이나 간간히 넘나들 정도다.

개비덕
안길운 꼭대기 언덕배기를 말한다. 본래 '고비덕'이라고 부른것이 변해 '개비덕'이 되었다. '고비'는 '높은곳'을 뜻하고 '덕'은 '언덕'을 뜻하는 말로 여진족 말에서 전해진 것이다.

뱃재
안길운 남서쪽에 있는 고개다. 옛날 재를 넘어오던 한 도사가 이곳의 산세가 이화낙지형국(梨花落地形局)인것을 보고 배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고개마루의 큰 돌배나무들도 이때부터 심은것이라고 하는데 하여튼 배나무가 많아 순 우리말로 '뱃재' 또는 '배나무재'라고 한다.
고개가 너무 험해 넘다보면 "배가 째질것같다"고해 '뱃재'라고 농담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개너머 영월군 중동면 이목리(梨木里)의 본래 지명도 '뱃재'였다. 10여년전 까지만해도 이목리에서 뱃재를 넘어 함백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여러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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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정선 신동읍 지명유래』, 1996, 정선아리랑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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