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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읍 천포리의 지명  

천포리(泉浦里)




신동읍에서 영월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중심으로 해서 양쪽으로 위치하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영월에서 마차재를 통해 정선 쪽으로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고 묵어 가던 역촌(驛村)으로 본래 지명은 하노일(下魯日)이었다. '천포리'라는 지명은 일제시대부터 생겨난 것으로 일설에는 앞의 벌판이 메마른 땅이나 비가 오면 물이 많이 나와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만, '어우른다'는 뜻의 옛말인 '얼'(泉)로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골짜기의 경사가 완만해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살았음을 족보나 문헌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지금은 정선 전(全)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1937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때 천포리에 속했던 석항(石項) 일부가 영월군에 편입되어 규모가 줄어들었고 현재에는 79가호 305명의 주민들이 안골, 곡기리, 양지마을, 골마을을 중심으로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원천포(元泉浦)
천포리의 중심에 있는 마을로 38번 국도 옆에 있는 마을이다.

혈구데이
천포리 마을 한가운데로 뻗어 온 예미산 자락의 정수리에 해당되는 곳에 있다. 마을 서쪽 석항천을 향해 다가서는 가재형국의 산세인 이 산자락 머리에 해당되는 곳 땅속에 엄지손가락 굵기의 쇠꼬챙이가 박혀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곳에서 장수가 난다고 해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혈(穴)을 질렀다고 주장하나 일본인들이 혈을 지르고 명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거짓 소문을 냈다고 보는 게 옳다. 몇 대째 이곳에서 살아 온 마을 사람들은 30∼40여년 전 이곳에 박힌 쇠꼬챙이를 흔들고 놀았다고 하나 지금은 흙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곧은 골
현재 천포리 경로당 뒤쪽의 골짜기로 천포리 간이상수도 시설지가 있는 골짜기다. 골짜기가 곧바르게 나 있어 '곧은 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수십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안골
원천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으로 나무가 우거진 유원지가 있고 테니스장 등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골마을
안골유원지를 지나 안쪽으로 산자락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안골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골마을'이라고 하는데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40여 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7가호가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앞재
골마을에서 서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고개이다. 골마을 앞에 있다고 해서 '앞재'라고 하며, 고개를 넘으면 영월군 중동면에 이른다.

뒷재
골마을 뒤에 있는 고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예미역 일대가 훤히 눈에 들어온다.

곡기리(曲吉)
원천포 남쪽에 있으며 골안 소나무의 자태가 완만한 능선과 잘 어울리는 마을이다. 마을 뒤로 구불구불한 골이 있으므로 '곡골'(曲谷)이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곡길'이 '곡기리'로 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곡기리'가 잘못 변용 되어 '코끼리 마을' '꾀꼬리 마을'이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지명이다.
'곡기리'는 본래 '곡골'(曲谷)이 '곡길'(曲吉)로 되면서 생겨난 지명이다.

곡기리굴
천포리 마을 입구에서 서남쪽 산에 있는 천연굴로 '굴뼝창굴'이라고도 한다. 굴 안에서 차고 맑은 물이 흐르는데 수십년전 굴속 고인 물에 왕겨를 쏟아 부었더니 영월군 중동면 석항리의 양지굴로 겨가 흘러나와 서로 통했다고 한다.
곡기리굴에는 이무기 얘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천포리 노인들이 안골 성황당 아래쪽에 앉아 있다가 굴뼝창을 보았는데 큰 뱀이 비늘을 번득이며 또아리를 틀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굴뼝창에 이무기가 산다고 해 가까이 가길 꺼렸으나 병자년 수해때 흙물이 나오면서 이무기도 떠내려갔다고 한다.
이 굴 30여m까지 들어가 본 사람들만 해도 천포리에 여럿 있으나 정확한 굴의 길이는 알 수 없다.

오리터
곡기리에서 영월군 중동면 화원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터'는 위치를 나타내는 말로 곡길에서 고갯마루까지 대략 오리(五里)가 된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서들굼이
지금의 신동주유소 뒤쪽으로 철길 건너편에 있는 골짜기다. 산자락에 굴러 내려 쌓인 돌더미(서덕)가 많이 있는 곳이라고 해서 '서덕굼'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다시 '서듥굼'에서 '서들굼이'로 변했다. '굼'은 '크다'라는 뜻인 '검'에서 온 말이다.

밤재
지금의 천포리 정부종합저탄장 자리를 말한다. 저탄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큰 둔덕이 있어 '받재'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밤재'로 정착된 것이다. '밤재'라고 하면 밤(栗)을 생각하기 쉽지만, '산'(山)의 옛말인 '받'으로 인해 생겨난 땅이름은 종종 '밤'으로 변해 한자로 표기되면서 마치 '밤'(栗)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쓰이기도 한다.

주막거리
천포리에서 종합저탄장에 이르는 국도 변에 있었다. 옛날부터 영월에서 정선으로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던 주막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던 곳이라고 해서 '주막거리'라고 한다.

용가
현재 신동주유소가 있는 곳 옆을 말한다. 예전에 연못이 있었는데 용이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고 해서 '용가'라고 부른다. 지금은 움푹한 못의 자취만 남아 있다.

짐대거리
지금의 정부종합저탄장 아래쪽 국도 변에 솟대가 세워져 있던 곳을 말한다. 옛날 얕은 둔덕에 높다란 장대 세개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러기와 비슷한 새를 나무로 깎아 올려놓은 것이 있었다. 그것을 '짐대'라고 하는데, 짐대가 서 있는 거리라고 해서 '짐대거리'라고 한다. 장대 위의 새는 마을 주민들이 3∼4년마다 다시 깎아 올려놓았다. 짐대가 서 있는 곳은 다른 곳보다 한길 가량 높은 지대에 위치했으며 매우 신성시했다. '짐대거리'를 '솟대거리'라고도 한다.

양지마을
원천포 맞은편 산자락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남쪽을 향해 있어 항상 밝은 햇빛이 드는  곳이므로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마을 앞으로는 석항천이 있으나 평상시에는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건내'(乾川)라고 부르는 곳이 있고, 비가 오면 물이 솟아나는 '큰물내기'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 마을 앞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어 논농사를 지었는데 수년전 마을 앞쪽에 정부종합저탄장이 들어서고 신동읍쓰레기매립장까지 들어서 이름에 걸맞지 않는 마을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3가호 1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큰물내기
양지마을에 있는 샘터 이름이다. 비가 오면 큰 물이 솟아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샘개" 라고도 한다.  '큰물내기'는 큰물이 솟아나는 '나다'에서 '나기'로 파생되어 'ㅣ' 모음 역행동화 현상으로 '내기'가 된 것이다.

샘개
큰물내기의 다른 이름으로 '개'는 '물이 흐르는 곳'을 뜻한다. 주민들은 '샘개'라는 말을 큰물내기 보다 선호한다.

재피골
양지마을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다. 인근 주민들 얘기로는 옛날 이 골짜기에서 누군가가 호랑이에 잡혔다고 해서 '잡힌다'가 '재핀다'로 변해 나온 이름이라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옛날부터 이 골짜기에 지게끈, 망 등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던 피나무가 많아 나무 껍질을 벗기던 재피질을 했던 곳이므로 '재피골' 이라고 하였다.

새목이
재피골 안쪽 골짜기 마을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온섬지기와 박죽동이 사이의 마을이라고 해서 '새목이' 라고 불렀다.

지실골
원천포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온섬지기 아래 골짜기로 골이 곧게 뻗어 있어 '직실' 이라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실골'이라고 불렀다. '직실'은 본래 '直谷으로 '곡'(谷)은 이두식 표기인 '실'로 읽는데, '실'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골짜기 안이 넓고 아늑해 20여년 전까지 만해도 3가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골짜기로 올라가면 예미리 유문동, 고성리 고림, 영월 북실로 넘어갈 수 있으며, 꼭대기에는 일제시대에 박아 놓은 쇠말뚝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다.

온섬지기
양지마을 뒤의 박죽등이 옆산을 가리킨다. 산의 모양이 곡식을 한 섬 쌓아놓은 것 같다고 햐여 붙여진 이름으로, '온섬지기'는 석회암지대로 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해 산의 모양이 둥그스레한 산에 주로 붙는 이름이다.

장군바우
온섬지기에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있는 바위이다. 주위에는 바위들이 그리 많지 않으나 그 가운데 유난히 우뚝 솟아 장군처럼 기세 넘친 모습이라고 하여 '장군바우'라고 부른다. 장군바우에서 보면 두리봉 정상 일대가 눈에 들어온다.

박죽등이
양지마을 뒤에 우뚝 솟은 산을 말한다. '박'은 '머리'나 '산'(山)을 뜻하고 '죽'은 '봉우리'라는 뜻의 '족'(足)이 변한 말로 '박죽등이'는 큼직한 산이라는 뜻의 옛말인 '박족등'에서 생겨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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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용선, 『정선 신동읍 지명유래』, 1996, 정선아리랑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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