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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읍 사북리의 지명  
 

사북리 (舍北里)




 사북읍은 조선시대에 동상면에 속해있던 지역으로 사음대, 북일, 고토일, 물한리, 발전, 수출 등 7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후 광무 10년(1906년)에 동상면과 동중면을 합해 동면 관내로 바뀌었고,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실시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북, 고한, 적전리 3개리로 구분되었다. 해방 후  사북 일대에 매장된 무연탄이 채굴되면서 광산이 늘어나자 산업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인구가 늘어나 1962년에 동면 사북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거리상으로도 멀고 늘어나는 지역 규모러 인해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자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사북읍이 신설되어 법정리 수 2개리, 행정리 수 15개리로 출발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몰아닥친 석탄산업합리화조치로 인해 많은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지만, 아직도 동원탄좌가 채탄을 계속하고 있다.
2000년 12월 현재 사북읍의 총 면 적 은 47.1㎢ 이고 2,847호에 7,982명이 거주하고 있다. 지역 특색에서 볼 수 있듯이 총면적 가운데 경지면적은 209.0ha에 불과하고 농가수도 85호에 이르는 전형적인 광산 마을이다.


노른가리
사북 1리에 있는 지명으로 '노음곡'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황가리(黃家里)라 하였으나 1935년경 노음곡(老陰谷)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노음곡에는 밀양 박(密陽朴)씨, 정선 이(旌善李)씨, 평창 이(平昌李)씨등 3성이 거주하다가 밀양 박씨는 약 50년전 원주로 이주하였고 정선 이씨는 어디론가 이주하였으며 지금은 평창 이(平昌李)씨만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사음대(舍音垈)
조선시대때 방좌수라는 천석지기 부자가 살았는데 이곳에 그의 토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마름(音)을 두었다고 하여 구 한자의 음을 따서 사음대(舍音垈)라 하였다

사음(舍音)
사음은 사음대와 노음곡(老陰谷)의 글자를 빌려서 사음(舍音)이라 하였다.

사북
사북은 사음대(舍音垈)와 북일(北日)이 합처서 사북(舍北)이라 칭 하였다.

도사곡
도사곡은 물이 서쪽에서 흘러 동쪽으로 가는 것이 그 특징이며 (西出東流水) 도사들이 도를 닦으러 많이 모였던 곳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당파싸움으로 밀려난 귀족들의 피난처로서 약 50호 정도의 집단부락을 이루어 옥수수, 조, 감자등을 심어 연명하였다 한다. 이곳에는 최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호방(戶房)격으로 마을을 이끌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풍기지방으로 이주 하였다고 한다.

범바위
사북중.고등학교 뒤편에 호랑이가 마치 하늟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형상을 한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약 30년전에 깨어져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가 힘들다.

범바위 골
범바위가 서 있던 골짜기를 말한다. 옛날 범바위가 서 있는 곳 아래 굴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낳아 길러서 산으로 데리고 갔다고 해서 범바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탕건바위
범바위 옆에 우뚝 선 바위 모양이 마치 탕건을 닮아 '탕건바위'라 불렀고 한다. 이 바위 또한 범바위와 함께 깨져버려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북일리  
북일은 일명 두일(斗日)로 두일리 북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이다. 평창 이씨 28대손인 광제, 광동, 광형 3형제 가운데 막내인 광형(기미 10월 14일생, 기유 8월 9일 사망)분은 울진 송씨와 결혼하여 경기도 용인에서 살다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즉시 벼슬을 버리고 단종의 뒤를 따라 낙향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영월군 상동면 법곡실에서 살다가 이 지역으로 이주 했다. 그 후 광형의 처제인 순흥 안씨가 임진왜란란 당시 황필구씨를 등에 업고 피난하여 평창 이씨와 평해 황씨가 살게 되었으며 그 후 풍기진씨가 들어와 같이 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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