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http://www.arirang.re.kr
조회: 12904
정선민요의 특징과 분포  
                                                                                  진 용 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1. 정선 민요의 음악적 특징

 정선은 예로부터 인근의 영월 평창과 함께 산다삼읍(山多三邑)이라하여 다른 지역과의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사회 경제생활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낫지 못했고 문화 또한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오는 독특한 양식을 오랫동안 갖게 되었다. 정선 지방은 거의 대부분이 산악 지역이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도 산골짜기에 드문드문 형성되었기에 의식주 생활 모든 면에서 산간문화가 주를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정선만의 독특한 문화는 민요의 음악적인 측면, 즉 선율 구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정선 민요의 음악 어법(音樂語法)은 선율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태백산맥을 축으로 함경도・경상도로 이어지는 ‘메나리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개인 또는 집단의 영향으로 인해 계면조나 평조의 음악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이러한 가락은 본래 정선에 뿌리를 둔 것이기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들어와 어렵게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선의 토속 민요가 선율 구조상 대부분 메나리조의 느리고 유장한(melismatic) 선율 형태를 보이는 것은 지형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불과 2, 30년 전 까지만 해도 노동의 현장, 놀이나 의식에서 민요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였다. 일을 할 때 능률을 올리는 촉매제로서 부르는 노동요만 놓고 보아도 비탈밭이 대부분인 정선 지방에서 가락이 빠른 소리는 자생할 수가 없었다. 민요가 필요에 의해 생성되고 사멸된다고 생각하면, 산간 마을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가락의 민요는 특수한 노동 현장이나 유희 공간에서를 제외하곤 맥을 이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정선의 민요에서 메나리조의 느린 가락이 대부분이고 빠른 가락이 자생하지 못하는 것도 지형적인 특징과 무관치 않다.
 가창 방식을 놓고 살펴봐도 정선 지방의 민요는 독창(獨唱)과 선후창(先後唱)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인다.
 민요의 가창 방식은 크게 혼자 부르는 독창(獨唱)과 여럿이 함께 참여해 부르는 공동창(共同唱)으로 나뉜다. 그리고 공동창은 다시 선후창, 교창, 제창으로 구분된다.
 평야가 많아 논농사를 주로 하는 지역에서는 한 사람이 소리꼭지(한 악절)를 부르고 나면 여러 사람이 같은 선율과 가사를 다같이 부르는 선입후제창(先入後齊唱)이 많지만, 정선 지방은 느린 가락의 소리를 한 사람이 부르는 독창(獨唱)이나 다른 여럿이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先後唱)이 대부분이고 제창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 특이한 점이다. 독창은 〈아라리〉와 〈다복녀〉와 같은 부녀요나 동요 등에서 많이 불려지고, 선후창은 후렴을 갖는 대부분의 노동요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정선 민요가 대부분 독창이나 선후창의 양상을 띄는 것은 지리적인 특성과 농사의 관행과도 관계가 있다. 정선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혼자라는 자기 존재의 확인과 역설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율적인 측면에서나 가창 방식 면에서 나타나는 정선의 민요는 다소 예외가 잇기는 하지만 느리고 장중한 가락의 노래를 혼자 부르거나 메기고 받는 선후창 방식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2. 정선 민요의 분포

 정선은 임계면 등 일부가 영동지방에 속해있고 신동읍 등 일부 지역이 영서지방에 속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동과 영서 어느 한 곳에 속한다고 잘라 말할 수 없는 지역이다. 영동과 영서에 속하지 않는 변방적인 요소는 민요에 있어서도 영동과 영서의 복합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라리〉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정선의 지배적인 민요라고 할 수 있는 〈아라리〉는 어느 한 기능에 밀착되지 않고 노동의 현장에서, 유희유희의 공간에서 널리 불려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물 뜯을 때, 밭 맬 때, 나무할 때, 떼를 매거나 탈 때, 심지어는 아이를 재울 때 자장가로도 불렸고 잔치 때나 여럿이 둘러앉아 놀 때도 부르는 다기능의 민요라 할 수 있다.
 〈아라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정선지방의 지배적인 민요로 자리매김 되었기에 정선에서는 ‘소리’는 곧 ‘아라리’라는 등식관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선의 소리를 대표하는 〈아라리〉의 주변에서는 여러 종류의 민요가 있지만, 그 소리는 필요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라리〉의 틈새에 활발하게는 부르지 못하고 있다.

 가.  노동요

 정선은 예나 지금이나 농사가 주업이었으므로 농업과 관련된 민요, 특히 밭농사에 관련된 민요가 많다. 지형적으로 보더라도 가파른 산이 많고, 밭 또한 이러한 산비탈을 일구어 경작을 했기에 〈밭가는 소리〉〈밭매는 소리〉〈괭이 소리〉 등이 다양하게 분포하는데 반해 농업노동요의 대표적인 〈논가는 소리〉등 논농사에 관련된 민요는 논농사를 짓는 정선의 일부 지역에서 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밭가는 소리〉는 지형의 특성상 밭농사가 주업이 되다시피 한 정선에서 특징적으로 분포하고, 지금도 그 필요성에 의해 기능과 함께 전승되는 민요이다.
 똑같은 밭이라고 해도 경사가 심하지 않은 춘천, 횡성, 홍천, 양구 등 영서 북부지역의 밭에서 소 두 마리를 모는 겨리소 소리가 분포되어 있지만, 정선 지방에서는 호리소 소리가 대부분이다. 화전으로 산을 일구어 경사가 심한 비탈 밭에 소 두 마리를 나란히 몰면서 밭을 갈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로 밭을 갈면서도 일정한 가락을 갖는 소리를 즐겼다고 하는 사실은 몇가지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를 부리는 사람이 어떤 음악적인 선율을 중요시 했다기 보다는  옛날 부터 부엌 옆 한 쪽에 외양간을 두고 생구(生口)라고 해 한 식구처럼 여긴 소와 대화를 하듯 한데 어우러져 호흡을 맞춰가며 일의 버거움을 덜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밭농사의 대표적인 〈밭가는 소리〉는 아직까지 정선 곳곳에서 필요에 의해 기능이 살아있는 민요이긴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굴삭기 등이 그 기능을 대신 하면서 점점 현장에서 사라져가고 밭을 떠난 노인들에 의해 더 쉽게 조사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밭일구는 소리〉는 비탈진 돌밭을 여럿이 함께 괭이로 일구며 선입후제창 방식으로 불렀던 소리다. 지금도 정선읍 가수리. 귤암리, 북면 여량리, 임계면 봉정리 등지에서 〈괭이소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밭가는 소리〉와〈밭일구는 소리〉와 〈밭매는 소리〉는 정선 지방에서 봄・여름으로 일상적으로 불려지는 소리였다. 그러나 밭을 맬 때 부르는 소리는 〈아라리〉를 제외하곤 별다른 것을 찾을 수 없다. 밭을 맬 때는 이웃 사람들이 함께 품앗이를 할 때가 많았다. 이 때는 〈아라리〉를 돌아가며 부르면서 일의 힘겨움을 덜었다.
정선이라는 지역성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밭을 매면서 부르던 〈아라리〉는 최근들어 일손의 부족에 따른 타 지역 일꾼의 집단적인 유입과 제초제 등의 사용으로 인한 기능의 변화와 상실 등으로 인해 그리 활발한 현장을 예전만큼 찾을 수 없다.  
밭농사에 따른 노동요 외에 정선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는 소리는 산에서 벌목을 해 나르고 집을 짓고, 때론 뗏목으로 엮어 한강을 통해 운송하는 과정을 통해 발달한 민요다.
 정선의 노동요 기운데 밭농사에서 생성된 소리들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을 이루는 소리가 바로 산에서 벌목을 해 옮기는 작업과 관련된 소리들이다.
〈운재소리〉는 선입후제창의 소리로 산에서 벌목한 통나무들을 산 아래로 끌어내려다 보내며 부르는 소리다. 앞소리꾼이 ‘쓰루’(우리말로 ‘황새목’)라는 도구를 가지고 나무 끝을 들어 방향을 잡으며 소리를 매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도비’(우리말로‘깍장쇠’)라고 하는 도구로 나무를 찍어 끌어당기면서 함께 뒷소리를 받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
 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산으로 올라가면서 베어놓은 나무를 한 곳에 모으고 나면 계곡을 따라 통나무를 둥글게 깔아 만들어 놓은 통길을 이용해 산 아래 집목장 까지 내려보내게 된다.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영건일람》(營建日覽)에는 대원군 때 경복궁 중수를 위해 정선, 인제의 많은 소나무들이 베어져 한양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벌목이 성행했던 시기를 알 수 있다. 그 후 일제 시대에 일본사람들이 많은 나무를 베어 갔으며 목도에 쓰이는 거도와 같은 각종 톱과 같은 연장들이 이 때 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벌목 작업은 옛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만 〈운재 소리〉가 경복궁 중수 때부터 불려졌다는 사실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일설에는 일제시대에 들어온 소리로 보기도 하는데, 발맞춤이 요구되는 집단 노동요가 2박자 계열의 규칙적 반복형태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이 이러한 추측을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운재 소리〉는 해방 이후 제무시 트럭(GMC 트럭)이 등장해 운목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산이 험하고 가파른 정선 산간 지방에선 통길를 이용하는 운목이 아직 남아있어 〈운재 소리〉가 불려질 듯 하지만 예전같이 산을 쩡쩡 울리던 소리는 눈에 띄지 않은지 오래다. 〈운재 소리〉는 노동력의 노령화로 인해 사라져가는 대표적인 소리가 되었다.
통길을 통해 산 아래까지 내려온 통나무는 목도꾼들이 줄과 목도채를 이용해 어깨에 매고 운반을 하게 된다. 이 때는 무거운 통나무를 쉽게 옮기기 위해 걸음걸이, 동작, 호흡 등을 맞추며 〈목도소리〉를 하게된다. 〈목도소리〉는 기능과 밀착된 소리로 통나무를 두 명이 메고 운반할 때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호흡도 가빠서 빠른 가락이지만, 목도꾼의 수가 늘어날수록 걸음도 느려지고 소리 또한 느려진다.
 〈목도소리〉는 앞소리와 뒷소리가 서로 맞물려 이어지는데, 소리와 호흡과 발이 맞으면 듣기에 도 시원하고 좋은 리듬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목도꾼들에 의해 옮겨진 소나무는 강변에 쌓아 두었다가 뗏목으로 만들어져 강길을 통해 서울로 옮겨졌다. 서울까지 보름 넘게 걸리는 뗏목을 타고 가면서 떼꾼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뗏목 노래〉를 불렀다. 뗏목은 기차나 자동차가 운목을 대신하면서 사라졌지만, 〈뗏목 노래〉는 아직 살아있는 떼꾼들과 정선읍 가수리나 귤암리, 신동읍 운치리 등지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로 학계에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가치를 지닌 소리다.
 밭농사와 벌채(伐採), 운목 등으로 인해 생겨난 노동요가 해가 갈수록 듣기가 어려워지는데 반해 〈아라리〉는 아직도 정선 곳곳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다. 〈아라리〉는 밭을 매면서 부르기도 했지만, 봄철 여자들이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적막감과 무서움을 덜기 위해 부르기도 했고, 남자들은 땔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다닐 때 지게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부르기도 했다. 또한 동면 호촌리 등지에서는 아직까지도 대마를 삶아 껍질을 벗겨 삼을 삼을 때 쓰이는 도구인 베틀을 소재로 한〈베틀노래〉가 있지만, 〈베틀노래〉 보다는 오히려 〈아라리〉를 훨씬 더 많이 부르고 있다.
 이밖에도 〈자장가〉, 〈아이 어르는 소리〉등 육아와 관련된 민요도 지역에 관계없이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나)  유희요

 강원도 지방의 민요에서 유희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고 하나 정선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유희요가 남아있다. 척박한 환경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생활로 인해 유흥민요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유흥민요는 다양한 모습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도구가 되었다. 따라서 유희 공간 또한 대규모의 집단적인 현장에서 벗어나 가족이나 이웃, 친지 중심으로 이루어져 소박한 모습을 띄게된다.
 이러한 모습은 가정 안에서 행해지는 놀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여럿이 모여앉아 다리를 끼우고 노래 끝말에 맞춰 다리를 하나씩 빼는 “이거리 저거리 갓거리”나 “앵기 땡기” 등의 〈다리세기〉동요에서 더욱 다양하게 나타난다.
 유희요 가운데 세시 민요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는 〈널뛰는 소리〉가 있다. 북평면과 임계면에서 에서 채록한 〈널뛰는 소리〉는 각각 동물을 소재로 하고 있거나 아이 어르는 소리인 〈풀무소리〉와 같은 소리여서 귀중한 자료다.
 또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새소리를 흉내내어 부르는 〈새소리흉내〉도 민요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이 단순하지만 나름대로의 내용이 있다. 가창자에 따라 〈새소리흉내〉는 몸동작이나 표정 등 표현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나 흥미를 돋우는 특징을 갖는다.
 이와 함께 유희요에는 각종 타령이나 숫자와 글자의 내력을 풀어 밝히는 풀이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도 많다. 정선 곳곳에 많은 분포를 보이는 〈어랑 타령〉은 일명 〈신고산타령〉으로 함경도 안변에서 발생한 민요라고 한다. 발랄한 가락과 거리낌없는 내용의 가사 때문에 지금도 마을 잔치 때나 흥겨운 판에 자주 등장하는 민요다.
 〈곱세치기 노래〉는 기름칠을 한 한지에 1에서 11까지의 숫자를 기록한 ‘진목’ 투전을 사용할 때 부르는 소리로 북면, 임계면, 남면 등지에서 골고루 채록되었지만, 가창자들이 모두 고령이고 투전 자체가 사라져 전승에 어려움을 준다.
 그러나 유희요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소리로 “다복 다복 다복네야”로 시작되는  〈다복녀〉와 〈시집살이 노래〉를 꼽을 수 있다. 어머니를 잃고 젖을 먹고 싶어 우는 다복녀에게 언젠가 어머니는 “~하면 온다더라”는 식의 반어적인 가정은 이승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역설적인 위안이 되는 측은한 가락의 연모가이다. “성님성님 사촌성님”으로 시작되는 〈시집살이 노래〉 또한 〈다복녀〉와 같은 규칙적인 선율구조로 정선지방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가사내용 또한 대동소이하다.
 이 밖에도 〈앞니 빠진 갈가지〉, 〈꽁꽁 꽁서방〉 등 수많은 동요가 유희요로서 정선 곳곳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다)  의식요

 의식요는 의례를 거행하면서 부르는 소리이다. 정선지방에 분포된 의식요는 세시풍속 의례요, 장례의식요가 있지만 후자가 대부분이다.
 세시풍속 의례요로는 ‘고사반’이라고도 하는 〈고사소리〉가 있다. 정초에 풍물패가 고삿상을 차려놓고 부르는 소리로 지금도 북평면 북평리 일대에서 정초가 되면 풍물패가 집집마다 다니며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고사소리〉를 부른다.  
 장례의식요는 장례의식 자체가 변화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장례의식요 또한 장례의식이 있을 때면 불려다니던 이들이 하나 둘씩 유명을 달리하고 노년층에서나 주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되었다.
 장례의식요는 〈대도둠 소리〉〈상여 소리〉와 〈회다지 소리〉로 나눌 수 있다.
 장례식 전날 밤 대도둠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소리에는 〈말멕이는 소리〉가 있다.
 대도둠놀이는 호상(好喪)인 경우에 장례가 나가기 전날 밤 동네사람들이 모여 빈 상여를 메고 갖가지 놀이를 하며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였다. 상가에 모인 상두꾼들이 마당에다 황덕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를 손을 잡고 돌다가 어깨동무를 한 뒤 나섰다 들어섰다 빙글빙글 돌며 〈말멕이는소리〉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5일장 7일장 때 성행했던 대도둠놀이도 십여 년 전 쯤 부터 3일장으로 바뀌면서 점점 사라져 〈말멕이는소리〉는 찾아보기 힘든 소리가 되었다.
〈대도둠소리〉의 뒷소리는 〈상여소리〉 보다 길게 뽑아 덧없는 삶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남면 무릉리, 신동읍 운치리. 덕천리, 북평면 남평리 등지에서 조사된 〈대도둠소리〉의 뒷소리는 “나무여 나무여 미리미리 타불” 등으로 죽은자의 윤회를 바탕에 깐 강한 불교적인 색채를 옅볼 수 있다.
 상여를 매고 가면서 부르는 〈상여소리〉는 행위에 따라 상여를 들고 나가는 소리, 상여를 운반하는 소리, 언덕을 오를 때 부르는 소리, 상여를 내리며 부르는 소리로 세분할 수 있다.
 상여소리는 대체로 12명에서 24명 정도의 상두꾼들이 상여를 매고 가며 발걸음을 맞추어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앞소리 사설로는 〈회심곡〉(回心曲)을 부르고 뒷소리는 “어의 넘차 어호”를 변형해 부르게 되는데, 자진소리를 할 때는 후렴구가 짧아지고 긴소리를 할 때는 “어호 어호 어이넘차 어호”식으로 나타난다.
 회다지소리는 무덤에 봉분을 쌓으면서 부르는 소리로 상여를 맸던 상두꾼들이 무덤 한가운데에 종말대를 세우고 선소리꾼 한 명과 보통 달구꾼 8명이 들어서서 회다지를 하면서 부른다. 앞소리는 〈답산가〉(踏山歌), 〈회심곡〉(回心曲), 〈초한가〉(楚漢歌)를 불러 삶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사후세계를 불교적인 내용으로 보여 주지만 끝 부분으로 가면서 소리가 빨라지면서 익살스런 언어유희를 통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긍정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회다지는 보통 3, 5, 7, 9의 홀수의 달구꾼이 하게 되는데, 선소리꾼의 소리가 뒤로 갈수록 빨라지면서 주변사람들도 뒷소리를 받아 흥을 돋운다. 회다지소리를 할 띠는 종말대를 중심으로 한 줄에 돈을 많이 꽂을수록 달구꾼들이 단단하게 봉분의 기초를 다진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회다지소리〉는 〈답산가〉, 〈회심곡〉, 〈초한가〉 등의 내용이 길어 전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와 함께 회다지소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마을의 노인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장례풍습 또한 바뀌면서 점점 사라져가는 소리가 되었다.  

 3. 정선 민요의 재인식

 정선의 민요 속에는 정선 사람들의 심성이 그대로 배어 있다.
 예로부터 산하(山河)를 빼어닮은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한다고 한다. 둘레의 산을 닮아 투박하고 억세기도 하되, 그 산 덩치에 힘이 부쳐 오히려 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선 사람들은 어질고 착한 땅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고 고왔으면 신라 경덕왕 때 이를 정표(旌表)한다 고 ‘정선(旌善)’이라 이름했을까.  굳이 정선 땅에 살던 사람들을 두고 “인심이 착하고 꾸밈새가 없으며 정이 두터워 서로 시비꺼리가 없다”(風渟俗朴無民訟)는 조선시대 문인 곽충룡(郭翀龍)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정선 민요에는 산에 올라 나물을 캐든, 때론 밭에 나가 종일 땀을 흘리든 자기가 처해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체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정선 민요 속엔 사람에 대한 원망이 없다. 설령 누군가를 원망하더라도 결국엔 빗겨나가 자연의 이치와 그에 대한 회유로 매듭지어지고 있다. 정선 사람들의 삶 하나하나를 새겨 보더라도 모든 세상을 자연의 눈으로 바라보고 자연의 이치로 바라보고자 했던 착한 심성이 배어있다. 구성지지만 긴장이 이완되지 않고 애교나 화사함보다는 투박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은근하면서도 솔깃한 호소력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착한 심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거리낌없이 토로했고, 고단한 삶의 문제가 노래에 얹히다보면 어느 새 신명으로 바뀌고 마음 속의 온갖 응어리가 풀어지게 되었다.
 일찍이 정선 사람들이 민요를 통해 보여준 것은 다름아닌 어질고 착함이었다. 도무지 풍족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부족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시대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정선 사람들. 세계가 도시화, 문명화의 후유증으로 호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언젠가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할 날이 올 것이다. 어쩌면 선(善)을 앞세워 도원(桃源), 그 찬란한 옛 이름을 확인하려는 게 아닌가.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