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걸 노인(가운데)와 필자(오른쪽)오늘도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가장 질긴 정서를 담아 애잔한 가락으로 흐른다. 아리랑은 애조를 띤 가락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는 은근과 끈기의 정신이 깔려있다. 아득히 먼 이국 땅에서 듣는 아리랑일수록 가슴 저미지만 아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리랑의 힘의 무엇인가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아리랑을 배우면서 아리랑 가락과 그 속에 배어있는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아리랑을 마치 서지학의 연구분야로 생각하거나 광복절 무렵 최초의 아리랑이니 최고의 아리랑이니 하면서 으레히 들장하는 깜짝쇼의 소재로 생각하기 일쑤다. 이러한 접근은 아리랑의 흥미를 잠깐이나마 유발시킬지는 몰라도 아리랑의 정신을 간과한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아리랑은 우리 가슴의 무시로 울리는 가락이기 때문에 소리를 떠난 아리랑은 아리랑으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읽기 마련이다.
우리네 가슴을 무시로 울리는 아리랑. 그 아리랑을 듣고 담기위해 나는 수 차례에 걸쳐 2백만 동포가 사는 중국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지를 다녔다.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한달에 걸쳐 중국 땅의 우리 동포를 찾아다니며 나는 아리랑을 가슴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만난 조선족 가운데 흑룡강성의 차병걸 노인은 아리랑을 가장 애절하게 불렀다. 아니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아리랑과 같았다. 차병걸 노인을 처음 만난 때는 1993년 5월. 조선족 작가와 예술가로부터 흑룡강성의 차병걸 노인이 아리랑을 잘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보름 지나 꼭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목단강 문화관장과 알고 지내는 작가에게도 같이 만나자는 한 통의 편지를 띄우고 때를 맟춰 무작정 중국에 갔다. 목단강으로 가기에 앞서 연길의 허름한 호텔 방에서 첫 날을 묵으며 차노인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에 뒤척였다. 나비잠 조차 자는 둥 마는 둥 새벽 1시에 깨어 역으로 갔지만 목단강행 기차표는 이미 동이 나고 없었다. 암표라도 있을까 한참을 살피다가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해 가기로 했다. 중국 돈 8백위안(당시 우리동은로 약 8만원)으로 흥정을 했지만 어느 택시 하나 먼 길을 선뜻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어둠 속에서 "어데로 가십네까?" 하는 우리 말과 함께 한 청년이 다가왔다. 연길의 조선족 택시기사라고 밝힌 청년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 없이도 통하는 핏줄,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리랑을 찾는 일은 언제나 술술 잘 풀렸다.
새벽3시가 막 넘어서 연길을 출발한 구 소련제 라다 택시는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목적지인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 문화회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구면인 조선족 문화회관장은 반갑게 나를 맞으며 악수를 하기도 전에 차노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순간 온 가슴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기척에 놀란 그는"누, 누구여?" 하며 혼자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반갑게 인사를 하자 차노인은 "남조선에서 온 다던 손님 이제서야 왔구만서리"하며 반겼다. 차노인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때서야 알았다. 내가 보낸 편지를 일줄일 전에 받고서 내내 기다리다가 어제 저녁에야 안내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고 했다. 내가 차노인을 만나길 기다린 것 보다 오늘을 더더욱 학수고대했다는 사실도 안내인을 통해 듣게 되었다.
평안북도 순천이 고향인 차병걸 노인. 열 다섯 살 되던 해에 일제에 쫓겨 압록강을 건넜지만 간도 땅도 온전한 피난처는 못되었다. 한창 나이인 스물 두살에 장티푸스를 않고 나선 두 눈이 멀었다."일본놈들이 장질부사 균을 뿌려서리 이렇게 되서.열이 올라 신경인지 신경줄인지가 끊어지면서리 안 보이기 시작했지". 일본군이 만주땅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세균을 뿌려 눈이 멀었다는 그는 앞을 보지는 못하지만 아리랑 뿐만 아니라 판소리, 민담 등을 풀어놓은 재주 하나 만큼은 흑룡강성에서 손꼽힐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교통도 수월치 않은 목단강까지 왔지만 아리랑을 부를 땐 피곤함도 잊은 듯 했다. 고향인 평안도 순천에서 압록강을 건널 때를 회상하며 불렀다는 '쪽박 아리랑', 독립군들의 피맺힌 절규를 담은 '독립군 아리랑' 등 구절구절마다 고향 떠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해주 아리랑' 으로 알려진 '아리랑 얼쑤'를 부르면서는 얼굴이 상기되었다. 분명 '얼쑤' 장단은 흥에 겨워야 하는데 북받치는 슬픔을 가누지 못햇다.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현실 때문이라고 했다. 끝없이 풀어져 나오는 차노인의 아리랑을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리랑은 노인에게 그리움이자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만큼 아리랑을 삶 가까이에 두고 살아왔던 것이다.
늦은 밤 차병걸 노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와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 한 편을 썼다.
연길에서 소련제 라다 택시를 타고
열시간이나 걸려 목단강 시에 닿습니다
오월 봄날이데도 참꽃 한 송이 피지 않았습니다
앞못보는 함경도 아바이 차병걸 노인은
일곱시간을 기차로 왔습니다.
남조선 손님을 맞는다고, 아리랑 하나 부른다며
드넓은 간도 땅을 냅다 달려왔습니다.
어릴 적 쪽박차고 두만강 건널 때 들었다는
아리랑 얼쑤를
수십 번 꼽씹으며 불렀습니다
부르고 불러도
얼쑤 소린 간데 없고 설움만 깊어갔습니다
얼쑤 소리가 맥빠진 건
남조선 북조선이 갈라졌기 때문이라며
속으로 속으로 울었습니다
이튿날 돌아가는 노인의 얼굴엔
불그레한 참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아리랑 얼쑤>전문
그당시 쓴 시<아리랑 얼쑤>를 생각할 때 마다 나는 차병걸노인을 생각한다. "아리랑 얼쑤를 부르며 춤이라도 덩실덩실 춰보고 싶다"는 차노인은 두고 온 고국 사천이 분단되었다는 현실에 늘 가슴이 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단을 넘어선 아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생전 '얼쑤' 가락에 옷자락 휘날리고 싶었던 그는 지난 해 겨울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그 아리랑이 애잔한 가락으로 흐른다. 오늘의 아리랑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일깨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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