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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정선아리랑 소리꾼 박사옥  

 1970년 10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 민요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정선아리랑 소리꾼들. 앞줄 오른쪽이 박사옥, 왼쪽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유영란,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최봉출, 그 옆이 나창주다.(사진제공 정선아리랑 명예기능보유자 최봉출).

 1970년 10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정선아리랑 소리꾼들과 인솔 임원들이 광주 무등산에 올랐다. 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박사옥, 그 옆이 나창주, 그리고 왼쪽에서 첫 번째가 최봉출, 세 번째가 고등학생인 유영란이다. 앞에 앉은 이는 당시 정선군 전문준 문화공보실장이다.(사진제공 정선군 화암면 원상선).

 기능보유자에서 탈락된 뒤 소리를 접고 가사에 종사하던 때의 박사옥.(사진제공 정선군 화암면 원상선).


 1960년대 문화의 황무지와도 같은 정선에서 정선아리랑의 토양을 일구고 씨앗을 뿌린 노력은 1970년대에 막 들어서면서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정선아리랑을 계승시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1969년 전국체전에서 강원도 선수단 5백여명의 입장곡으로 정선아리랑이 강원도의 대표적인 소리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강원도는 1970년 10월 21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리는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정선아리랑을 출전시키기로 했다. 향토민요 정선아리랑의 전국대회 출전은 안팎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원을 고려 망국의 한을 담은 노래로 처음으로 정립하고, 출전에 앞서 정선아리랑 LP 음반(SJ10-7012)을 제작했다. 정선군이 기획해 신진레코드사에서 제작한 이 음반은 묵계월, 최창남, 황용주 등 경기민요 소리꾼들이 부른 정선아리랑 20수(긴아리랑 16수, 엮음아리랑 4수)와 김희조가 채보해 편곡한 후 KBS합창단이 부른 정선아리랑을 수록하고 있다.
 음반을 제작할 당시 묵계월, 최창남, 황용주 등 경기민요 명창들이 정선아리랑을 부르게 된 데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앞두고 정선아리랑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처음 출전한 정선아리랑 소리꾼들은 문공부장관상을 받으며 기량을 뽐냈다. 예술성보다 관중에 치우치거나 남의 눈을 끌려고 애쓰지 않고 소박하게 전래의 민요를 되살려낸 정선아리랑이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가 속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는 막을 내렸다.
 당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통해 정선아리랑을 대외적으로 알린 출전 팀에는 최봉출, 나창주 등 정선의 대표적인 소리꾼과 여성 소리를 대표하는 박사옥이 있었다.
 박사옥(朴四玉)은 1918년 정선군 동면(현재 화암면) 석곡리에서 아버지 박경숙과 어머니 전숙부 사이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세 살이 되던 해인 1930년 화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36년 졸업했다. 큰 키와 몸에 비해 맑고 가는 목소리였지만 호소력 있는 목소리여서 정선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알려진 명창이다. 특히 낮은 소리에서 높은 소리로 올라갈 때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청은 매우 돋보였다. 1960년대 동면에서 이미 마을 잔치 때면 불려 다니는 소리꾼으로 소문이 났으며, 이러한 계기로 동면사무소에서 정선군에 추천해 1970년 여름부터 최봉출, 나창주 등의 소리꾼과 함께 연습에 들어갔다. 그는 1970년 10월 2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봉출, 나창주의 소리와 함께 구성진 여자 목소리를 선보여 정선아리랑의 맛을 알리고, 문공부장관상을 받는데 한몫을 하기도 했다.
 박사옥은 전국대회 출전을 앞두고 고등학생이던 유영란에게 토속적인 맛깔의 아리랑을 가르치기도 했다. 1971년 11월 16일 민속경연대회에서 주축을 이루었던 최봉출, 나창주와 함께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고 했으나 이후 납득할 이유 없이 탈락되자 크게 낙심했다. (1972년 7월 19일 정선군에서 강원도지사에게 보낸 「지방문화제 지정자료 제출 공문에는 정선아리랑 보유자를 나창주, 박사옥, 최봉출로 기록하고 각각의 신원증명서와 이력서를 첨부하고 있다. 이 공문에 따르면 박사옥은 적어도 1972년 7월 19일까지는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의 주축으로 활동했고, 정선아리랑이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는데 기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낙담 뿐이었다.
 상심한 그는 1972년 이후에는 모든 활동을 접고 가사에 종사했다. 그 후 이따금씩 마을의 모임이나 잔치에서 정선아리랑을 불렀지만 예전 같은 흥과 열의는 보이지 않았다. 1987년부터 중풍으로 투병하다가 199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  글/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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