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페이지: http://www.arirang.re.kr
조회: 8087
나운규의 영화『아리랑』이후  
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을 다녀간 이들은 나에게 영화자료관 하나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종종 한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함백극장 사진과 공연장면, 포스터, 강렬한 색깔 표지의 영화 대본 등 빼곡히 쌓여있는 영화자료들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나는 영화대본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한정된 부수로 찍어내 배우와 주변인 등이 돌려보는 영화대본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고서점 등을 다니며 구해 읽으며 영화 속에 빠져들곤 했다. 오래전부터 어두침침한 영화관 속으로 들락날락 하던 나는 나운규라는 이름에 낯익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결코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시대와 사람들에 관한 정서적인 접촉과 그들이 내뿜는 아리랑노래 라는 두 갈래 접근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었다 .

우리나라에서 『아리랑』을 제목으로 단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처음 나왔다.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일에 지금은 헐린 단성사에서 개봉한 무성영화 『아리랑』은 일대 사건이었다. 우리가 지금 부르는 노래 아리랑도 이 영화의 주제가로 처음 세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 했다.

일제강점기 아리랑 영화 이후 최근까지 10여 편이 넘는 아리랑 영화가 나왔다.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 심지어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처녀 아리랑』(1993), 『누드아리랑』,『여자아리랑』(1993)처럼 외설적인 영화도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달곤 했지만, 대부분의 아리랑 영화는 민족적인 정서인 한(恨)과 신명, 민족적인 자각을 담으려고 했다.

일제강점기 나운규가 만든 영화를 스토리를 그대로 다시 만든 대표적인 영화는 1957년 장동휘가 주연을 한 김소동 감독의 영화 『아리랑』이다. 이 영화는 1957년에 남양영화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당대 이름을 날리던 장동휘, 조미령, 윤봉춘, 김동원, 윤일봉 씨 등 최고 배우들이 출연하자 장안에선 나운규가 살아왔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1974년에는 신성일, 박지영이 주연으로 임원식 감독이 나운규가 주연했던 영화 『아리랑』을 다시 시도했다. 신성일이 주인공 영진의 역을 맡아 열연한 영화『아리랑』은 「한국영화의 금자탑」, 「민족의 혼」, 「코리아 광시곡」등 영화대본에 드러난 수식어를 보아도 민족에 대한 알레고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003년에도 이두용 감독이 나운규의 『아리랑』을 새롭게 조명하고 부활시킬 것을 목적으로 현대 감각에 맞춰 리메이크한 무성영화 스타일의 『아리랑』을 만들었으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 초기영화인 활동사진이 처음 소개된 1897년, 그리고 5년 뒤인 1902년 나운규는 태어났다. 그가 세상 물정를 채 알기도 전에 나라는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상심한 조선 사람들은 극장에 모여들어 남의 나라 활동사진이나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과 느낌 사이를 고단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나운규는 자신이 영화의 제1세대 개척자로 기록될 것을 알지 못한 채 시네마 키드로 등장했다. 그리고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의 맹서』가 발표된 지 3년 만에 기적처럼 등장한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사진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나운규는 한국영화사의 거대한 그늘이자 아리랑의 태양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나온 영화 아리랑은 여전히 나운규의 그늘에 놓여 있다. 그런 까닭에 앞으로도 어떤 영화가 아리랑의 이름으로 나올지 궁금하다

   * 글/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 사진/정선아리랑학교 추억의 박물관 소장자료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