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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과 소리꾼 김옥심  
                                 정선아리랑, 서울에서 김옥심을 만나다

정선은 토속민요, 서울에선 통속민요

 정선아리랑은 옛날부터 정선에서 부르는 것과 서울에서 부르는 것이 다르다.
 본래 정선에서 부르는 정선아리랑은 긴 아리랑과 노랫말을 촘촘히 엮어 가는 엮음아리랑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늘어지는 정선 엮음아리랑을 정선아리랑이라고 불렀다. 훗날 정선에서의 정선아리랑과 하춘화가 부른 정선아리랑이 다르다는 혼돈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정선아리랑의 두 갈래 혼돈이 표면화한 것은 정선에서 불려지는 정선아리랑이 1970년도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부르는 소리는 '정선아리랑'이고 정선에서 부르는 소리는 '아라리' 또는 '정선아라리'라고 해 자연스럽게 구별이 되었다. 그러나 '정선아라리'의 명칭이 '정선아리랑'으로 공식화되면서 혼돈은 시작되었다.
 이미 정선지역의 '아라리'와는 다른 '정선아리랑'은 서울에서 광복 이후 대중성을 지닌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정선아리랑이 언제부터 서울에서 불려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치가 않다. 다만 조선조 말엽 대원군이 경복궁 중수를 할 당시 정선의 인부들과 떼꾼들이 한양을 오가며 정선의 소리를 불렀고, 이 과정에서 정선 사람들이 부르는 아리랑이 서울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후 일제강점기 당시만 해도 정선아리랑은 밀양아리랑이나 진도아리랑에 비해 대중화하지 못했다. 그 당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는 알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에 나온 많은 유성기 음반 가운데 유독 정선아리랑이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선아리랑은 광복이후가 되어서야 활발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정선 소리꾼 박사돌(朴巳乭)이 서울에서 음반을 취입했다는 『정선군지』의 기록도 사실 여부조차 확인 할 수 없다. 유성기 음반은 물론이려니와 1970년대 이전까지 정선 토박이소리꾼이 취입한 LP 음반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에 반해 서울에서는 해방 이후부터 전문소리꾼들이 유성기음반을 비롯해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다.

 심금을 울리는 김옥심의 정선아리랑

 정선 본바닥에서 정선아리랑은 극히 소박하고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모습으로 남녀노소 구별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이 되어온 데 반해 서울에서는 직업적인 민요명창들이 세련되게 다듬어서 불렀다. 서울에서 정선아리랑이 통속민요(通俗民謠)로 전파범위를 넓혀간데 반해 정선에서는 토속민요로 자리매김 했던 것이다.
 정선의 토박이 소리꾼들과는 달리 서울의 정선아리랑은 경기민요 소리꾼들이 먼저 음반취입을 하고 매체로 전파하면서 정선에서 보다 더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에서 정선아리랑을 부른 가장 대표적인 소리꾼은 김옥심(金玉心)을 든다. 1925년 태어난 김옥심은 우리나라 민요사에서 불꽃같은 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 비운의 소리꾼이다. 김옥심은 어려서부터 민요를 잘 해  '소리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나이가 들면서 경서도창 경기민요 등을 익히기 시작했다. 김옥심이 정선아리랑을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 한 것도  해방 후 이창배가 『가요집성』에서 정선 엮음아리랑 가사를 바탕으로 정리한 '정선아리랑'을 통해서였다. 곧바로 김옥심은 1950년대 들어 가야금의 성금연, 민요의 이은주와 함께 킹스타레코드에서 정선아리랑을 취입했다.

    태산준령 험한고개 칡넝굴 얼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구비치는
    골짜기 휘돌아서 불원천리 허덕지덕
    허우단심 그대를 찾아 왔건만
    보고도 본체만체 돈담무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만 주소

 킹스타합주단의 애절한 반주에 맞춰 부른 이 정선아리랑은 구슬프고 구성진 멋이 담겨져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우려주는 구성진 애수에 젖게 한다.  정선아리랑에 문외한이라도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듣는 이들은 누구나 찡한 감동에 젖어들었다.

 6.25 전쟁 이후 인기..급속히 전파

 사싷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6. 25 전쟁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김옥심은 '육군군예대'에 가입해 위문공연을 가게 되었고, 이 때 주로 부른 노래가 '정선아리랑'과 '한오백년'이었다. 정선아리랑 계열인 한오백년은 일제강점기 김란홍이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적이 있으나 김옥심이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다. 특히 김옥심이 정선 엮음아리랑을 자기소리에 맞게 바꿔 부른 정선아리랑은 전쟁 이후 가장 인기를 끈 민요가 되었다. 식민지시대의 암담한 삶과 광복 이후 전쟁에 시달린 우리 민족의 울분과 한이 이입되어 설움과 한을 쓸어 내리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해 급속도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김옥심의 목청은 한과 흥겨움이 교차하고 누구든지 흉내낼 수 없는 구성진 가락을 소화해 시쳇말로 김옥심 신드롬을 낳았다. 김옥심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서울제 정선아리랑은 빠른 시간에 확산되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김옥심이 취입한 음반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신세기, 킹스타, 대도, 도미도, 오아시스 등 김옥심이 취입한 음반에는 정선아리랑이 들어있었다. 김옥심의 구성진 정선아리랑 가락은 뭇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가냘프지만 곱고 슬픈 목소리의 기교에 놀란 당대 명창들조차도 하늘이 내린 소리라고 했다.
 정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정선 본바닥의 아리랑과 다르다고 폄하할 수 있다. 정선아리랑을 왜곡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옥심은 암울했던 시절 정선 엮음아리랑을 자신의 목소리에 맞게 고친 정선아리랑을 통해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정선아리랑의 맛을 선사했다. 김옥심은 정선아리랑이 강원도 산하를 맴돌 무렵 자신만의 목소리로 애절한 아리랑 가락과 함께 '정선'을 귀익게 한 선두주자였다. 후일담이지만 신경림 시인은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은 내게는 노래이기 이전에 내 정서의 깊은 샘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글/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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