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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기-토종소리 맥 잇는 큰 줄기  
 
  아리랑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어울림을 부추기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정선 땅에 와서 김남기의 소리를 듣고 곰씹어 본 사람이라면 가장 향토색 짙은 소리꾼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소리마다 배어 나오는 뭉틀뭉틀한 사투리는 정선아리랑에 낯선 사람들에게 조차 마음의 문을 열고 어우러지게끔 한다.
 비록 정선아리랑 전수장학생으로 있지만 정선아리랑을 멋들어지고 노긋노긋하게 부르는 까닭에 기능보유자에 가장 근접한 소리꾼이라는 안팎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37년 정선군 북면 여량리 절골에서 김이철과 김사현 사이에 8남8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밭농사를 지어 많은 가족들이 근근이 살아가는 까닭에 집안 형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교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배고프고 힘에 부친 삶이 계속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빼닮은 듯 한 정선아리랑이 귓전에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열두 살 때부터는 정선아리랑을 입에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낮에는 힘든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아리랑 가락을 떠올리며 가사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군에 입대해서는 정선아리랑을 많이도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마을 사람들은 '명창'이라는 호칭을 달아주었다.
 소리꾼 나창주씨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소리를 하는 곳이면 언제나 같이 따라가 나씨의 구수한 가락을 몸에 익혔다. 잠을 잘 때에도 한마디라도 더 배우려고 나씨와 같은 방을 썼다.
 고진감래랄까. 1977년 제 3회 정선 아리랑제가 열리면서 펼쳐진 정선아리랑경창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으며 그의 소리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크고 작은 행사에 참가해 정선아리랑을 시연하고 전수활동에 몰두해 기능보유자와 함께 대표적인 정선의 소리꾼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를 지도하던 나창주씨가 세상을 떠난 1981년부터는 최봉출씨로 부터 아리랑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리는 태생'이라고 여겨온 그는 늘어지는 가락에 익숙하다. 그가 살아온 삶이 유장한 소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부르는 정선아리랑은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다. 그만큼 가사를 많이 안다는 뜻도 되지만 소리가 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리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정선사투리 또한 투박하면서도 살가운 맛이 스며있다.

   해나무 동박아 유절권 머리
   가달가달 모습모습에 멋이 드렁ㅆ구나
   
   동박지름을 슬슬발라서 윤태나는 저 머리
   오복수 법당 댕기도 멋이 들었구나

 산 목련의 일종인 해나무 동박 열매로 기름을 짜 머리에 반질반질 윤이나게 바른다는 이 가사를 그는 즐겨 부른다. 아니 어려웠던 유년시절 한껏 멋을 부려 보고픈 꿈이 반추되어 지금은 아리랑으로 술술 풀어가는게 아닐까.
 그는 엮음아리랑을 특히 잘한다.  구수한 시골 노인네의 입당처럼 촘촘 엮어 가는 소리는 듣는 이들의 너털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텔레비전과 신문, 여러 책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져 오가는 이가 그치지 않을 만큼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 유명세가 톡톡히 치르고 있다. 그 유명세가 소리를 살찌워야 하는데 순박한 그의 천성을 흔들지나 않을까 늘 걱정이 앞선다.
 그는 오늘도 아우라지에서 멀지않은 여량1리 녹고마니 마을에서 살고 있다. 부인 변춘자씨, 어려서 눈이 먼 딸 옥자씨 등 가족 모두가 정선아리랑을 잘해 1994년 신나라레코드에서 만든 『한반도의 아리랑』에 소리가 실리기도 했다.

글/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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