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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란-열여덟에 기능보유자 되다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 유영란(劉瑛蘭)은 1954년 평창군 평창읍 하리에서 유봉규 이재남 씨의 5남 2녀 중 맏달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 열 살 되던 무렵 정선읍으로 이사를 한 것이 오늘날 명창이 된 계기가 되었다.
 섬세하고 호소력있는 목소리를 가져 일찌감치 돋보였던 그가 정선아리랑에 눈을 돌린 때는 정선여자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0년 이었다. 그해 가을 광주에서 열리는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기위해 정선아리랑을 연습하면서 부터였다.
 정선아리랑 이라고는 하지만 합창으로 불리게끔 편곡된 가락이어서 구성진 맛은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맑은 목소리로 듣는이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지도하던 최봉출 나창주 박사옥씨 등 당대를 대표하던 정선아리랑 소리꾼들의 눈에 쏙 들게 되었다. 당시 정선군 문화공보실장이던 전문준씨는 소질이 뛰어나다며 토종아리랑을 배워보라고 했다. 판에 박은 듯한 합창을 그만두고 편안한 소리를 배워보고싶은 솔깃한 생각도 했지만 대회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무대경험을 쌓기위해 정선극장과 평화극장을 바쁘게 오가며 영화가 끝나면 무대에 올라 다음 상영시간가지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두둑한 배짱도 키워갔다.  
 여러 날을 갈고 다듬은 목소리는 마침내 전국대회에서 정선군 팀을 1등에 올려 놓았다. 그저 아리랑을 잘 부른다는 평범한 여고생이 정선아리랑 소리꾼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열 일곱살 이었으니 다른 소리꾼들에 비해 소리공부의 시작이 상당히 늦은 셈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섬세함으로 가락과 가사의 이해가 빨랐던 그는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1971년 자신을 지도하던 최봉출 나창주씨와 함께 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것이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몰랐어요. 기능보유자가 뭐하는 건지도 몰랐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배워야겠구나 하고 마음 먹었지요"
 그날부터 배우기 시작한것은 소위 토종이리랑 이었다. 동면 화암리에서는 박사옥씨로 부터 구성진 맛이 나는 정선아리랑을 배우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기능보유자가 오히려 소리를 배우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다니며 열정을 보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귀감이 되어 뭇사람들의 칭찬을 인색치 않게 한다.
 자기 소리가 제일이고 자기만이 제일이라는 소리판 풍토에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선배를 존경하며 후배를 아낄 줄 안다.
 한 번 익힌 소리를 자기 소리로 만들어가며 20대 중반부터는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섰다.
 "이제야 겨우 정선아리랑의 참맛을 알것같은데 구성진 맛이 아직도 나지 않는것 같아 혼자 고민을 많이 하지요"
 음성과 박자가 제대로 맞지 않아도 할머니들의 아리랑이 가슴을 울린다는 그는 즐겨 부르는 애달픈 아리랑을 간직하고 있다.

      간다지 못간다지 얼마나 울었소
      송정암 나루터가 한강수가 되었네

 한 때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정선을 떠나 강릉에서 살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무리 바빠도 삽당령을 넘어 매주 한 번씩 열리는 정선아리랑 전수교실에 나가 아리랑에 원숙미를 더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였다. 정선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땅이었기에 몇년전 다시 돌아왔다. 정선아리랑을 널리 보급하는 일이 기능보유자로서 자신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정선아리랑전수회의 수장으로서 창극에도 열중하고 있다. 무대에 서기만 하면 온갖 열정을 다 쏟아 붓는 프로근성을 갖고 있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범한 주부로 돌아오는 소리꾼이다.

 글/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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