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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정선아리랑 소리꾼들  
 

 슬픔과 기쁨을 넘나들며 삶의 원동력이 되는 소리 아리랑, 정선아리랑.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소리라 그 역사에 비해 기록은 크게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아리랑의 힘은 질기디 질긴 맥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아리랑의 맥, 그리고 그 맥을 이어온 소리꾼은 누구였을까.
 풍운의 한말 이래로 정선아리랑을 부른 소리꾼들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충분하지 않으나 고덕명(高德明), 김천유(金千有), 박순태(朴順泰), 정명노(鄭明魯) 등을 들 수 있다.

 1866년 정선읍에서 태어난 고덕명은 열 살 무렵부터 정선아리랑을 잘 부른다고 해서 읍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때부터 봇짐장수인 아버지를 따라 강릉 양양 함경도 원산 등지를 다니면서 앳띤 모습으로 정선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어렸을때부터 몸에 익은 유랑생활 때문인지 그후에도 이순의 나이에 이를때까지 스무살 정도 아래인 북면 태생의 김천유와 함께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정선아리랑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그후 정선아리랑은 박순태라는 걸출한 소리꾼에 의해 더욱 퍼져나가게 된다. 1896년 정선 북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돌(四乭)이라고 불렸다.  열세 살 때부터 여자 옷차림을 하고 함경도 원산 회령 등지를 돌아다니며 정선아리랑을 불렀다.  그의 나이가 서른 세 살 되던 1920년 9월에는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기념(施政紀念)및 총독 환영 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 갔다가 뜻하지않게 민요경연대회에 출연했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을 불러 당당히 입상을 했다.

 정선아리랑 하나로 전국에서 몰려든 소리깨나 한다는 사람들과 겨뤄 입상한 그는 당시로선 큰 돈인 6원을 상금으로 받고 곧바로 음반 취입도 했다. 정선 사람이 처음으로 음반취입을 한 역사였다.

 박순태의 소리 편력은 발닿는 곳으로 이어졌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말을 사다가 평창 영월 등지에 팔기위해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를 자주 드나들면서 정선아리랑을 전파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엿장수를 하며 정선땅 곳곳을 다니면서 사람을 모아놓고 정선아리랑을 부르곤 했다.

 정선읍 신월리의 정명노도 해방 전 서울에서 열린 민요경연대회에서 입선해 소리꾼들의 세계에 정선아리랑을 알게 모르게 심어놓았고 정선아리랑의 위상을 높이는 기틀을 다졌다.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소리꾼들이 암울했던 시대의 삶을 노래하다 세상을 떠났지만 “시름겨워 아리랑 좋은세상 온다고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부르던 아리랑은 어느덧 전국으로 퍼져나가 이땅의 산하를 쩡쩡 울리고 있다.

 글 / 진용선(정선아리랑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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